[야구는 구라다] 형광등 100개, 오승환의 환한 얼굴 참 오랜만이다

조회수 2017. 9. 22. 15:3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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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뭐, 우리도 그렇기는 하다. 별로 다를 것 없다. 잠시 왔다가는 외국인 선수 아닌가. 깊은 정 기대하는 것부터가 무리다. 하지만 막상 지켜보자니 참 여러 생각이 든다. 그를 향한 싸늘한 시선들 말이다.

아직 와일드카드 가능성은 조금 남았다. 그럼에도 야구 도시 세인트루이스는 일찌감치 1년 결산을 시작하는 눈치다. 워낙 기대치가 높은 곳 아닌가. 그들에게는 만족스러운 시즌이었을 리 없다. 그러니 뭐가 잘못 됐는지 들춰보고, 따져보고, 한참 그러는 중이다.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라는 매체는 특히 카디널스 소식에 밝은 곳이다. 그들이 요즘 독자들과의 자주 Q&A를 벌이고 있다. 말이 질의/응답이지 사실 여론 재판 같은 느낌이다.


어제(21일)는 호세 드 헤수스 오티스라는 칼럼니스트가 그 일을 맡았다. 휴스톤에서 10년 넘게 애스트로스 전담으로 있었는데, 작년부터 직장을 바꾼 저널리스트다. 그는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만약 작년 겨울에 웨이드 데이비스를 데려왔으면, 세인트루이스는 지금 신나게 1위를 달리고 있을 것이다.” 데이비스는 시카고 컵스의 마무리 투수다. 올해 55번의 등판에서 ERA 2.01의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무엇보다 32차례의 세이브 기회를 모두 지켜냈다. 


◇ 카디널스 블론 세이브


① 브렛 세실 = 6번


② 오승환 = 4번


③ 맷 보우먼 = 3번


④ 트레버 로젠탈 = 2번


하루 전에도 비슷한 뉴스가 있었다. 매체는 같지만, 다른 기자였다. 그는 “구단의 올해 이후 마운드 운용 계획에 오승환은 포함돼 있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는 다른 팀의 플랜에 있는 지도 의심스럽다.” 뭘 그렇게 돌려 말하는 지 모르겠다. 그냥 미국에 계속 남아있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면 될 것을.


요즘 계속 이어지는 보도의 핵심은 같다. 그러니까 올 시즌 카디널스 부진의 가장 큰 이유는 불펜, 특히 마무리 투수(들)의 부진이라는 주장이었다. 매정한 지적이다. 기분은 별로다. 어디 뒤에 나온 투수들만 못했나. 선발들도, 중심 타선도 제 구실한 사람 별로 없다. 그렇다고 딱히 정색하고 반박은 못하겠다. 뭐,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 사람들도 그 속담을 아나? ‘입이 열 개라도….’


한 달 전의 ‘쎄~한’ 분위기


한 달쯤 됐다. 정확하게는 8월 18일이었다. 피츠버그 방문 경기에 등판한 날이다. 11-5로 여유있던 9회, 마운드에 올랐다. 쉽게 설거지를 마치고 퇴근하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


조시 해리슨과 앤드류 매커친에게 연속 안타를 맞았다. 아웃 카운트 1개를 잡은 다음에 데이비드 프리즈에게 2루타를 허용했다. 홈런이 될 뻔한 타구였다. 1점을 주고, 1사 2, 3루의 위기가 계속됐다.


다음은 좌타자 애덤 프레이저였다. 초구 94마일짜리가 몸쪽 깊은 곳으로 향했다. 2구째. 역시 94마일이었다. 이번에는 더 깊었다. 공은 프레이저의 오른쪽 허벅지를 강타했다. 순간 그라운드는 ‘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다분히 고의성을 의심받을만한 상황이었다. 제구력이라면 나름 한 가닥 하는 투수 아닌가. 직구 2개를 그렇게 심하게 붙일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1루도 비어 있었다. 까다로운 좌타자였다. 주자가 많아진다는 걸 걱정할만한 점수 차이(11-6)였나? 그보다는 연속된 안타에 대한 분노와 짜증이 투수의 마인드 컨트롤에 영향을 줬을 지 모른다는 추측이 먼저 떠오른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결과들이 이어지던 시기였다.


벤치는 놀란 토끼 눈이 됐다. 마이크 매서니 감독과 데릭 릴리퀴스트 투수 코치, 통역 구기환 씨의 눈길이 일제히 마운드로 향했다.


다행이다. 사태는 악화되지 않았다. 잠시 고통스러워하던 타자는 별 다른 액션 없이 1루로 향했다. 입가에는 약간의 냉소가 흘렀다.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개막전(4월 3일, 시카고 컵스)에서 2개 이후 처음이다. 무려 4개월 보름만에 나온 사구였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참을 수 없는 뭔가를 억누르고 있던 그 얼굴을 아직도 눈에 선하다.

사구 장면. 벤치의 놀란 표정, 프레이저가 공에 맞고 찬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mlb.tv 화면


12일만의 출근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났다. 중간에 병가에 월차 휴가까지 썼다. 햄스트링에 문제가 생겨 열흘 넘도록 자리를 비웠다. 무려 12일만이었다. 만약 확대 엔트리 기간이 아니었다면 DL(부상자 명단)이 거론될만한 긴 공백이었다.


물론 긴장감은 별로였다. 8-2로 일방적이던 7회였다. 그래도 당사자는 남달랐을 것이다. 말했다시피 오랜만의 출근 아닌가.


첫 타자는 6번 호세 페라자였다. 93마일짜리 3개가 연속으로 꽂혔다. 스트라이크, 헛스윙. 그리고 3구째는 우익수 플라이였다.


두번째 패트릭 키블리한은 깔끔했다. 역시 93~94마일짜리로 카운트를 잡았다. 1-2에서 4구째는 하이 패스트볼. 깜짝 놀란 배트가 따라나왔지만 공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헛스윙, 삼진 아웃.


세번째는 간단했다. 터커 반하르트가 초구를 건드렸다. 중견수가 앞으로 한참 달려나와야 했다. 내야 플라이나 다름 없는 타구였다.


사실 그렇다. 1, 2점을 다투는 빡빡한 상황은 아니었다. 상대한 타자들도 소름끼칠 레벨은 아니었다. 그 정도에 호들갑 떤다는 건 그에 대한 예우가 아닐 지 모른다.


직구 8개로 세 타자를 굴복시키다


그러나 분명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우선은 볼배합이다.


어제 던진 8개는 모두 빠른 볼(포심 패스트볼)이었다. 경기 후 본인의 말이다. “점수 차이가 꽤 있었다. 공을 받은 (포수) 몰리나가 계속 직구 사인만 냈다. 끝나고 나서 ‘패스트볼이 워낙 좋아서 모든 구종을 직구로 갔다’고 얘기하더라. 나도 자신감이 있었다.”


보통 ‘좋았다’는 의미는 두가지다. 마음먹은대로 로케이션이 잘 됐다는 뜻일 수도 있고, 위력이 좋았다는 말일 수도 있다. 어제의 경우는 후자였다.



사실 제구가 잘 된 공들은 아니었다. mlb.com에서 추적한 궤적을 보면 대부분 가운데로 몰리거나, 높은 코스로 통과했다. 구석구석을 찌르는 예리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말은 하나의 사실을 반증한다. 그만큼 공의 위력(회전력)이 살아있었다는 뜻이다. 흔히 ‘볼 끝’이라고 부르는 작용 말이다. 그것 때문에 높은 볼에 헛스윙이나 플라이 볼이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아니었다면? 아마 펜스 근처로 가는 장타가 됐을 것이다.


하긴 rpm(분당 회전속도)이나 mph(시간당 마일) 따위의 복잡한 물리학 단위를 우리가 신경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당사자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훨씬 쉽다.



반하르트를 하이 패스트볼로 굴복시켰다. 중견수 팝 플라이는 이닝을 마감하는 세번째 아웃 카운트였다. 그 때였다. 오랜만에 출근했던 그의 얼굴이 한꺼번에 활짝 폈다.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환함이었다. 글러브에 오른쪽 주먹을 힘차게 꽂아 넣었다. 볼을 빵빵하게 만들며 큰 숨도 몰아쉰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아이처럼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파울 라인을 넘으면서 몰리나를 영접했다. 어깨를 두들기며 기분 좋은 인사도 나눴다. 만족스러운 웃음도 입가에 머물렀다. 분명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1이닝을 산뜻하게 지웠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근을 서두르는 모습. mlb.tv 화면


컨텐츠는 스스로 빛을 낼 것이다 


말했다시피 그의 내년은 불투명하다. <…디스패치>가 얼마나 내부 사정에 밝은 지는 모르지만 ‘세인트루이스의 플랜에는 없다’며 부정론을 단언했다. 게다가 다른 구단도 비슷할 것 같다는 악담까지 곁들였다. 더 이상 메이저리그에서 커리어를 이어가기 힘들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한국이나 일본이 만만한 것도 아니다. 시즌 절반에 해당하는 징계(출장정지)가 여전히 유효하다. 과거 사건으로 인해 폭력단과의 연계성에 대한 (일본의) 알러지 현상이 해소됐는 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예상, 예측, 전망에 우선하는 것이 있다. 바로 컨텐츠의 ‘밝기’다.


남고, 떠나고. 계약이 어떻고…. 이것들은 사실 비즈니스의 영역이다. 결국 실체를 기반하게 돼 있다. 지금 현재, 얼마나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느냐. 거기에 따라 얼마든 지 좌우되기 마련이다.


실체는 그라운드에서 입증된다. 숫자로만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직접 부딪히며 겪는 당사자들만이 느끼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 얼마나 강한 지, 얼마나 빠른 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지. 때로는 그들의 표정 하나, 몸짓 하나가 숫자보다 더 많은 의미를 전한다.


컨텐츠는 결국 스스로 빛을 낼 것이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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