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리뷰] 당황과 연륜사이 즉흥 1인극의 묘미..손숙 '하얀토끼 빨간토끼'

이재훈 입력 2017.09.2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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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손숙, 연극 '하얀토끼 빨간토끼'. 2017.09.22. (사진 = 스파프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연극배우는 극작가와 관객의 매개자다. 21일 오후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선보인 이란 극작가 낫심 술리만푸어(36)의 '하얀 토끼 빨간 토끼'에서 배우 손숙(73)이 증명했다.

'2017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스파프)'를 통해 한국에 처음 선보인 작품이다. 배우조차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즉흥 1인극이다. 공연 직전 대본을 처음 받아 현장에서 연기를 해나가야 한다.

출연배우들은 48시간 전 스파프로부터 몇 가지 주문을 받는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일체의 사전정보는 차단된 채 무대에 오른다. 무대 구성도 단출하다. 테이블 하나, 그 위에 물이 담긴 컵 두 잔, 사다리 하나 그리도 대본 거치대.

손숙이 두 개의 작은 통을 들고 무대 위에 등장했다. 이어 스파프 프로그램 디렉터인 이병훈 연출이 나와 그녀에게 대본이 담긴 봉인된 봉투를 건넸다.

이 PD는 연습, 연출 없이 진행되는 연극"이라면서 "'바람이 새긴 문자'(피터 브룩)라는 속성을 지닌 연극 장르를 가장 잘 표현해줄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1964년 연극 '상복을 입은 엘렉트라'로 데뷔한 53년차 '연극계 대모' 얼굴에 살짝 긴장감이 감돌았다. 손숙은 봉투를 뜯으며 "50년 연극하면서 이런 건 처음이에요. 어제, 그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웃었다.

공연 내내 객석까지 조명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1인극이지만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다.

객석 맨 앞줄에 앉은 관객들에게는 각각 1번부터 17번까지 번호가 부여됐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토끼 또는 곰이 된다. 서커스에 연극을 보러 간 토끼가 입장권을 사는데 보태주기 위해 실제 1000원도 내놓아야 한다.

【서울=뉴시스】 손숙, 연극 '하얀토끼 빨간토끼'. 2017.09.22. (사진 = 스파프 제공) photo@newsis.com

대본은 작가와 배우 또는 작가와 관객이 대화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중심이 '하얀 토끼 빨간 토끼' 관련 실험이다.

우리 안에 토끼 다섯 마리를 가둔다. 사다리 위에 당근 하나를 올려놓는다. 당근을 차지한토끼에게는 빨간색 페인트를 칠한다. 나머지 하얀 토끼들에게는 얼음물을 끼얹는다. 당근을 차지한 빨간 토끼가 주로 당근을 차지한다.

결국 하얀 토끼들은 빨간 토끼를 물어뜯는다. 빨간 토끼를 우리 밖으로 꺼내고 다른 토끼를 집어넣는다.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얼음물을 끼얹지 않아도 하얀 토끼들은 빨간 토끼를 물어뜯는다.

여기서 테이블 위에 놓인 물 두 잔을 기억해야 한다. 공연 초반 관객이 한 잔에 독극물로 설정한 하얀 가루를 섞어 넣었다. 관객들이 중간에 눈을 감은 상황에서 물 두 잔의 위치를 옮겨 놓아 관객들은 독극물이 든 컵의 존재를 모른다.

이런 정황은 극을 쓴 작가 술리만푸어의 고국인 이란의 상황과 겹쳐진다. 전쟁을 반대하는 그는 이란에서 군복무를 하지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권이 없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토끼처럼 갇혀 있는 상황이다. 대신 2010년 집필된 '하얀 토끼 빨간 토끼'로 다른 나라 관객을 상상하며 만나고 있다. 그는 관객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느낀 점, 생각들을 듣고 싶어한다. 공연 도중 한 관객에게 극 내용에 대한 필기를 부탁하고, 메일 주소를 남긴 이유다. 이란은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차단된 상황이다.

약 70분간의 공연을 마친 노장은 "망신당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고 웃었다. 손숙은 토끼 흉내는 물론 목 길이만 1m 넘는 타조 흉내는 날개짓까지 흉내내며 고군분투했다. 연극 '장수상회' 서울 공연, 연극 '사랑별곡'의 지방 공연까지 동시에 소화하고 있는 그녀다.

공연은 본 무대가 끝나고 나서 2막이 시작됐다. 손숙과 관객이 작품을 통해 느낀 점을 교감하는 자리가 30분가량 이어졌다.

【서울=뉴시스】 손숙, 연극 '하얀토끼 빨간토끼'. 2017.09.22. (사진 = 스파프 제공) photo@newsis.com

'하얀 토끼 빨간 토끼'는 단순히 관객 참여형 연극이 아니었다. 관객 참여·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넘어 관객의 몰입(immerse)을 유도하는 '이머시브 공연'의 또 다른 결을 보여줬다.

작가가 처한 이란의 현실, 한국배우와 관객이 처한 지금의 현실이 자연스럽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즉흥 1인극이라는 날 것의 형식은 꾸밈없는 감정이 교감되는 통로가 됐다.

술리만푸어는 우리 식으로 따지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다. 손숙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그는 지난해 말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너무 놀랍고 당황스럽다고 밝히기도 했다.

손숙은 "너무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어요. 예술은 건드리지 않아야 합니다. 앞으로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모르죠"라면서 "그래도 예술은 길들여지지 않아요. 가난하고 힘든 연극을 왜 건드리는지 모르겠어요. 낫심은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 분이 더 자유로워지기를 응원해요"라고 말했다. 술리만푸어에게 작품의 감상을 남기고 싶거나 응원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e-메일 주소를 남긴다. nassim.sm@gmail.com

한편 '하얀 토끼 빨간 토끼'는 이날 공연을 포함해 24일까지 총 6차례 공연한다. 손숙을 비롯해 총 6명의 걸출한 배우들이 한 회씩을 책임진다. 이호재, 예수정, 김소희, 하성광, 손상규다. 배우들마다 러닝타임이 상이할 수 있다.

realpaper7@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