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작침] 천만 영화의 '불편한 진실' ③

이주형 기자 2017. 9. 22. 09:2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2. 우리는 이렇게 ‘천만 영화’의 비밀, 아니 ‘불편한 진실’을 마주쳤습니다. 관객 동원 1위 영화의 일별 좌석점유율 60% 이상인 날이 3년 만에 5배나 늘었습니다. 일간 1위 영화가 전국 스크린의 60%에서 상영되는 날이 1년이면 30일 이나 됩니다. 스크린 독과점 얘기가 이미 나오고 있었던 2013년에도 6일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위 영화의 상영회수와 좌석점유율, 매출액은 해마다 늘고 있습니다. ‘천만 영화’는 이렇게 탄생하고 있습니다.

13. 영화는 전형적인 경험재(experience goods)입니다. 실제로 서비스나 상품을 사서 사용한 뒤에야 비로소 효용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일단 영화를 봐야 좋든 싫든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는 뜻이죠. 그런데 다양한 영화들을 볼 기회 자체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면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 취향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볼 기회 자체가 사라집니다. 또 지금의 취향을 넘어서 세련된 취향을 계발할 여지도 없어지죠. 멀티플렉스에서 얘기하듯이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상영관을 많이 배정한다는 말이 맞기도 하지만 전부 맞는 것은 아니기도 한 지점입니다. 특정 영화에 스크린을 지나치게 많이 배정하니까 그걸 볼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취향이 발전하지 못하고 고착화합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는 말이 있지요. 또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말도 다양하고 깊이 있는 경험의 중요성을 일러줍니다.

14. 수직계열화와 스크린 독과점은 한국에만 있는 현상은 아닙니다. ‘예술영화의 나라’ 프랑스도 수직계열화한 3개의 멀티플렉스 체인이(CGR, UGC, 고몽 파테)이 전체 수익의 52%를 차지합니다. 파리 지역만 보면 전체 수익의 89%를 가져가죠. (이런 가운데서도 파리의 88개 영화관 중 33개가 독립영화관이라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일본도 도호(東寶)시네마와 도에이(東映)같은 대기업이 영화 제작과 배급, 상영까지 겸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한국과 좀 다릅니다. 올 상반기 일본 최대 흥행작인 ‘미녀와 야수’의 스크린 점유율은 22%에 불과했습니다.

15. 지난 8월 초 일본의 CGV격인 도호시네마 도쿄 신주쿠점의 사례를 한번 살펴봤습니다. 12개 스크린에서 상영한 영화는 모두 18편, 도호 시네마 도쿄 신주쿠점 부지배인 스즈키 씨의 말입니다.

“스크린 12개에서 25~30편을 늘 상영하고 있습니다. 최고 인기 영화도 가장 좌석수가 많은 스크린과 두 번째로 많은 스크린에서 횟수를 늘려서 상영합니다. 그 이상의 스크린에서 상영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하나의 작품이 독점해버리면 다른 영화가 상영되지 못하고 결국 관객이 보고 싶은 영화를 못 보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죠. 도호그룹 회사의 영화라는 이유로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수요가 있는 작품을 상영하는 컨셉이기 때문에 특별히 (계열사 영화를) 지원하지는 않습니다.”

16. 일본의 유명 영화평론가 오오다카 히로씨에게도 스크린 독과점과 수직계열화를 법률로 제한하는 문제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그는 조금은 조심스럽게 답했습니다. “좀 더 상황을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일본도 금방 이런 시스템이 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경험치가 큽니다. 결국 영화관의 수익이 얼마나 올라갈 것인가 올라가지 않을 것인가가 중요한 겁니다. 타사 영화인가 자사 영화인가는 최종적으로 관계가 없어져요.” 하지만 그도 영화라는 문화 상품의 특수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의지를 갖고) 꾸준히 상영해야만 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적 문제작이라든가...이런 영화는 첫 주, 둘째 주에 끝나면 안 되고, (적은 스크린에서도) 꾸준히 장기간 상영해야 합니다. 장르라든가 내용이라든가 영화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이런 걸 충분히 고려해서 상영하지 않으면 전체 수익도 오르지 않고, 또 영화는 문화이기 때문에 상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영화도 있어요. 그런 영화는 확실히 상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스크린 수를 많이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라는 것은”

17. 일본 영화산업 역시 수직계열화한 대기업들이 있는데도 한국처럼 극심한 스크린독과점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일본 특유의 남의 눈을 의식하는 문화에 기인한 점도 있어 보입니다. (우리도 적당히 염치는 차리며서 살면 안될까요) 게다가 일본의 영화산업은 한국에 비해 침체돼있어 오히려 한국 영화의 소재적 다양성이나 완성도, 스케일을 부러워하는 상황이기는 합니다. 최근 한국영화산업의 발전은 상당 부분 대기업의 적극적인 투자와 경영 활동에 힘입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크린독과점이 지속되고 심화하면 한국영화는 어느 순간 획일화의 덫에 걸려들 공산이 크고,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그걸 딛고 일어설 싹조차 짓밟혀 사라진 뒤일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패션이나 음악처럼 창작자가 필요하며, 또한 재생산이 필요한 산업이다. 몇몇 대기업이 시장을 장악하면 산업 전체는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모두가 H&M과 자라에서 옷을 산다. 하지만 새로움을 가져다 주는 독립 크리에이터들 없이는 쇼핑의 즐거움은 점차 희미한 것이 될는지 모른다"

보고서 <집중화에 대항하는 영화계: 프랑스 영화산업 내의 독립 경제 활동에 가해지는 위협들(2016.6.)> 中
- 피에르 코프(파리1대학 교수, 변호사) 

글 이주형, 안혜민
데이터분석 안혜민
디자인·개발 임송이
일본 취재·번역 최호원  

이주형 기자joolee@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