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북유럽풍 삶을 살고 싶다

입력 2017.09.2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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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삶의 사소한 계기 찾아 천천히 즐길 줄 아는
북유럽 사람들에게 배운 내면을 돌보는 자세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올 여름방학 때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을 번갯불에 콩 볶듯 후다닥 둘러본 뒤, 요새 나는 심각한 ‘북유럽앓이’를 하고 있다. 북유럽 관련 서적이 나오면 냉큼 사서 한달음에 읽고, 북유럽 라이프에 관련된 사소한 뉴스라도 나오면 마치 고향에 큰일이라도 난 듯 눈이 휘둥그레져 넋을 잃곤 한다. 이런 나 자신이 싫어질 정도로 북유럽 라이프에 대한 동경이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다. 물론 나는 한국에서 계속 살 것이고, 마흔이 넘어 이민을 떠날 의지도 없으며, 지금 내가 꾸리는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그런데도 자꾸만 ‘북유럽 라이프’에 대한 관심과 질투를 끊을 수 없는 이유는 그들로부터 무언가 배우고 싶어서다.

행복한 개인을 키우는 방법

무엇보다 간절한 것은 삶의 구석구석 깊숙이 뿌리박힌 절제 기술이다. 그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무언가를 가지려 하기보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삶의 사소한 계기를 찾아 천천히 즐길 줄 안다. 행복해지려고 남을 짓밟지 않고, 타인의 행복을 전시하는 이미지를 보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라며 모방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가진 것에서 행복의 섬세한 디테일을 찾아내는 차분한 여유를 배우고 싶다.

북유럽 여행을 하면서 내가 살아온 한국 사회가 ‘탁월함에 중독된 사회’임을 아프게 깨달았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어떻게든 특별해지려고 기를 쓰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겉으로는 ‘평범한 것이 행복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마음속으로 ‘나는 왜 특별하지 못할까’ ‘나는 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을까’라며 멀쩡한 자신의 삶을 평가절하 한다. 나 또한 ‘무언가 중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며 강박관념을 심어주는 한국 교육이 싫었지만, 그 집단최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아누 파르타넨의 책 <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 북유럽 사회가 행복한 개인을 키우는 방법>(노태복 옮김, 원더박스, 2017)을 읽다가 나는 북유럽의 라이프스타일을 포착하는 흥미로운 십계명을 발견했다. ‘얀테의 법칙’이라는 것인데, 1933년 출간된 악셀 산데모세의 소설 <도망자, 자신의 자취를 가로지르다>(En flyktning krysser sitt spor)에 등장하는 십계명이다. 얀테라는 가상 마을에서 사람들이 지켜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것인데, 북유럽 사람들의 집단적 심성을 잘 나타냈다.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2. 당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선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3.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4.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확신하지 마라

5.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6.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7. 당신이 뭔가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8. 다른 사람들을 비웃지 마라

9. 누구든 당신한테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10.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최고의 30명 리스트’ 트라우마

언뜻 보면 매우 비관주의적 삶의 태도 같지만, 이런 절제와 냉철함을 갖춘 것이 북유럽 라이프의 전반을 가로지르는 마음챙김 방식으로 보였다. 그들은 타인의 성취에 비추어 자기 삶을 판단하지 않는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최면에 도취된 경쟁사회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가치관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저 십계명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저런 삶을 실천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느끼는 집단적 우울감과 필요 이상의 열등감을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경쟁, 서둘러 일하기, 빡빡한 일정, 과한 운동을 싫어한다. 미국에서 매일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해치우는 무진장 바쁘고 빠르고 정열적이고 자신만만하고 뛰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어도 때론 힘이 빠진다.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들이 받는 칭송이 내 존재 전부를 나무라는 듯하다. 미국에서 평균적이라는 것은 썩 좋지는 않다는 뜻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너희는 특별하다’라고 늘 말하는데,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가 정말 특별하다고 진실로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로서는 그런 부모의 기대가 스트레스와 압박감의 원천일 수 있다.”(<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깊은 슬픔에 빠졌다. 작가가 미국 문화의 ‘탁월함’을 향한 강박관념으로 느낀 슬픔의 1천 배 농도의 슬픔과 패배감을, 우리는 매일매일 느끼며 살기 때문이다.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강박을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학습해 온 우리는 항상 자신을 ‘뭔가 모자란 존재, 아직 멀고 먼 존재, 제대로 살려면 인생을 통째로 리셋해야 하는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누 파르타넨의 책을 읽다가 문득 고등학교 시절 어느 끔찍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 학년 전교생이 300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학교였지만, 입시 경쟁은 무척 치열했다. 선생님들이 어느 날 갑자기 ‘지금부터 전교 1등부터 30등까지 명단을 차례대로 교내에 공개한다’고 선언했다. 열일곱 살 소녀가 받아들이기에는 충격적인 결정이었다.

나는 한사코 그 ‘최고의 30명 리스트’가 적힌 종이 전단을 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멀리 떨어져 걸어갔지만,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우르르 모여 있던 아이들의 탄식과 중얼거림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누구는 몇 등이래.’ ‘어머 누구는 여기 들 줄 알았는데 못 들었네.’ ‘누구는 의외로 성적이 좋네.’ 떠들썩한 수다 속에 과연 ‘살아남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나는 선생님이 된다면 절대 저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거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은 내 친구들을 ‘적’이자 ‘경쟁자’로 만드는 적대감 리스트였으며, ‘탁월하지 않으면 가치 없다’는 냉혹한 세계관을 주입하는 반교육적 행위였다. 나는 그 리스트 앞을 지나갈 때마다 쇠꼬챙이 같은 것이 심장을 날쌔게 찌르는 아픔을 느낀다. 학창 시절 소중한 추억을 되새기다가도 가끔 ‘최고의 30명 리스트’를 떠올리면 여전히 등골이 서늘하다. 마흔이 지나도 어린 시절 상처는 더 또렷한 얼굴을 하고 ‘극복되지 않은 트라우마’로 남아 아직 다 흘리지 못한 슬픔의 선혈을 뚝뚝 흘리곤 한다.

느리디느린 나무늘보가 산다

마음을 사로잡는 한 가지 주제에 깊숙이 파고들다보면, 그 주제에 대해 공부하게 되지만 자신을 더 깊이 알게 된다. ‘북유럽 라이프’에서 무엇을 배울까 고민하던 요즘, 내가 왜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프레드 아들러, 카를 구스타프 융 중에서 융을 가장 좋아하는지 깨달았다. 심리학의 3대 거장 가운데 유독 융에게 이끌린 이유는 그가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외부세계보다 누구에게도 쉽게 펼쳐 보일 수 없는 내면세계에 침잠했기 때문이다.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을 읽었을 때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어떻게 외부 사건을 거의 묘사하지 않고, 오직 내면 묘사만으로 이토록 재미있는 자서전을 쓸 수 있을까’ 생각했다. 자신의 영웅적 면모를 드러내는 글쓰기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고통과 번민이 삶을 할퀴고 지나갔는지, 그 마음의 그림자에 맞서 자신이 어떻게 투쟁해왔는지 그린 자서전이었다.

어쩌면 우리 내면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내면을 돌보지 못한 현대인의 삶은 ‘외적으로 특별해 보이기’ ‘남들보다 뛰어나 보이기’에 골몰하느라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의 마음을 쓰다듬는 일에 손을 놓아버린 것 같다. 융의 자서전을 읽었던 10여 년 전 어느 날부터 내 인생은 바뀌었다. 더 뛰어나고 싶고 더 대단해지고 싶은 ‘사회화의 열망’을 절제하고, 더욱 내면으로, 더 깊은 무의식 속으로 침잠하는 삶에 열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는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사회화’의 열망을 가르치느라 내면을 돌보고 가꾸는 삶, 즉 ‘개성화’의 중요성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이제 그만 사회화하고 싶다. 남은 시간을 온전히 나 자신이 되는 일, 즉 개성화에 쏟아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융 심리학을 공부한 뒤, 예전에는 그토록 힘들었던 글쓰기가 ‘나의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이 되어 즐겁고 아름다워졌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외적인 페르소나보다 내면의 그림자를 관찰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이 더욱 샘솟게 되었다.

나는 행정 서류를 빨리빨리 처리하지 못하고, 신호등의 ‘몇 초 남았습니다’ 안내가 늘 모자라게 느껴지고,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 자꾸 내릴 역을 놓치는 사람이다.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에 나오는 갑갑하고 느려터진 나무늘보의 미소가 가끔씩 그리워진다. 작품 속 나무늘보는 너무 강력한 ‘신스틸러’라서 오랜 시간이 지나자 그토록 깜찍했던 주인공 주디보다 더 깊은 인상으로 각인됐다. 내 안에도 그런 느리디느린 나무늘보가 산다. 세상의 속도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지만 급한지도 모르고 불편한지도 모르며 다만 내 삶에 만족하는 나무늘보가 내겐 참으로 소중하다.

더 풀어쓰고 더 길게 펼쳐보고

말도 안 통하는 북유럽에서 그들을 어설프게 흉내 내며 살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북유럽 라이프에서 배우고 싶은 것은 타인을 향한 깊이 내면화된 존중이다. 예의상 급하게 타인의 불편을 고려해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불편함을 느끼기 전에 제도적으로 습관적으로 배려와 존중을 하는 그들의 섬세함을 배우고 싶다. 채식주의자들이 어디서나 자신이 가장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를 수 있고, 장애인들이 교통기관을 이용하는 데 불편하지 않으며, 젊은이들이 ‘흙수저로 태어났으니까 도저히 금수저를 따라갈 수 없다’는 강요된 패배감에 짓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흔 문턱을 넘어서며, 재빨리 요약하고 번개처럼 핵심을 파악하는 세상 속도를 따라가는 일을 멈췄다. 그런 ‘얼리 어답터’스러운 삶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느림보로 살더라도 대상의 섬세한 디테일을 하나하나 쓰다듬고 관찰하는 삶을 사랑한다. 그 무엇도 요약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더 풀어쓰고, 더 길게 펼쳐보고 싶다. 그것이 내게 어울리는 삶이니까. 이제는 조금 더 느리게 가도 괜찮은 나이, 아니 느리게 가야만 더 멀리 더 그윽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나이니까. 멀리서도 눈에 띄는 반짝반짝 빛나는 삶보다, 느리지만 오래오래 좀처럼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곰살궂은 빛과 향기를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삶을 살고 싶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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