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맞춤형 필터'는 무럭무럭 자란다

입력 2017.09.2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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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보수와 진보로 완전히 갈라선 온라인 공론장…
언론 편식하는 독자들 ‘필터버블’로 정파적 편향 더욱 강화

‘하이프롬디아더사이드’ 서비스는 온라인에서 보수와 진보 성향 이용자들을 토론으로 연결해준다. 하이프롬디아더사이드

정보가 차고 넘치는 인터넷 세상에서 누군가 내 입맛에 맞는 정보를 찾아주겠다고 한다. 내가 뭘 원하는지도 알아서 살피겠다고 한다. 나와 같은 물건을 산 사람들이 또 어떤 다른 물건을 샀는지도 귀띔해준다. 그것도 공짜로. 얼마나 가상한 일인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공짜니 누리면 그만일까? 제대로 누리고는 있나? 정말 공짜이기는 한 걸까?

평소 관심 가졌던 내용의 글이 올라와 읽고 ‘이거다 싶어’ 공유하고, 마침 딱 필요한 물건이 목록에 올라와 구매 단추를 눌렀을 뿐인 우리에게 이런 질문들은 아직 낯설다.

가상현실 기술을 처음 대중화한 컴퓨터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재런 러니어는 “스스로 더 낯설게 만들어보기”를 권한다. “인터넷 업체들이 알고리즘으로 정교하게 설계해놓은 매트릭스 세상은 편리하고 달콤해 한 발짝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도 여행 다녀오는 셈 치고 6개월만 그것들을 끊어보자. 그러면 자신에 대해, 친구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인터넷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미래는 누구의 것인가>, 2016) 러니어는 ‘추천’ ‘맞춤형’ ‘관심사’ 등 아름다운 단어 뒤에서 정교한 돈벌이 알고리즘을 작동시키는 인터넷 업체들을 ‘사이렌 서버’로 부른다. 노래로 선원들을 홀려 스스로 물속에 몸을 던지게 하는 그리스 신화의 사이렌에 빗댄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업체들의 서버에서 작동되는 알고리즘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음악 같은 개인의 선호나 취향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현대 인터넷 비즈니스의 기술적 진화 방향이 갈라서 묶고(clustering) 거르는 것(filtering)으로 정해진 이상 업체들이 스스로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둬야 할 이유는 없다. 굳이 내 직업이나 연봉 데이터를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막강한 학습능력을 갖춘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인터넷 공간 여기저기 남긴 흐릿한 내 발자국들만으로도 ‘3-B그룹’ 같은 계층 딱지를 자신 있게 연산해낼 것이다. 내 정치적 성향 정도는 자주 클릭하는 기사나 댓글만으로 간단히 뽑아낼 수 있다.

지난호(제1177호)에서 살펴본 실험들은 우리를 가둔 그 거품을 우리 손으로 깨보자는 다양한 노력이다. 보수와 진보 성향 이용자들을 토론으로 연결해주는 ‘하이프롬디아더사이드’(hifromtheotherside.com)를 만든 헨리 차이 대표는 “도널드 트럼프를 찍은 사람들이 정말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알고 싶었지만 페이스북 등 내 주위 어디에도 궁금증을 해결해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며 “(이 사실에) 대통령선거 결과만큼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의 미디어 지형은 이미 보수와 진보로 완전히 갈라서 있다. 언론이 다양한 생각을 전달하며 여론을 형성해가는 공론장 구실을 해야 한다는 말은 둘 사이 벌어진 거리만큼 아득하다. 정치적 지향에 따라 언론을 편식하는 독자는 정파적 편향을 더욱 강화해간다. 이미 골이 깊은 이념의 필터버블에 날고 뛰는 기술까지 더해졌으니 속수무책인 셈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선 왜 필터버블을 깨기 위한 시도조차 보이지 않을까? 최근 보수-진보 ‘맞짱 토론’ 사이트를 기획하다 포기했다는 한 벤처업체 대표는 “기사 대부분이 포털에서만 소비되는 독특한 미디어 지형에선 뭘 해볼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네이버와 다음에서 진보와 보수가 소통하는 여론의 장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괜히 손댔다가 탈 난다는 생각에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중립적 플랫폼’을 벗어날 생각이 없다. 물론 그 업체들의 뒤뜰에선 이 시간에도 부지런히 우리를 가르고 나눌 정교한 알고리즘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함석진 넥스트인스티튜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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