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미당·황순원문학상 수상자] 소외된 사람들 이야기 쓸 때면 내가 거짓말 하고 있다는 느낌

신준봉 입력 2017. 9. 22. 01:02 수정 2017. 9. 22.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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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문학상 소설가 이기호
성석제·박민규와 함께 웃기는 작가로 분류되는 이기호씨. 진지한 단편 ‘한정희와 나’로 황순원문학상을 받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올해 황순원문학상 수상자 이기호(45)는 ‘웃기는’ 작가다. 작품만 그런 게 아니다. 그와 잠시만 얘기를 나눠봐도 알게 된다. 얼마나 유머가 체질화된 사람인지를. 평범한 이야기도 그가 얘기하면 웃긴다.

그런 이씨의 수상작 ‘한정희와 나’는 뜻밖에도 웃긴 얘기가 아니다. 소설은 반대로 묵직하다.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어디까지 공감할 수 있는지, 누군가를 아무런 조건이나 한도 없이 환대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를 묻는다. 현실의 이기호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소설 속의 소설가 ‘나’와, 아내와 조카 관계라고 해야겠지만 실제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래서 나의 입장에서는 타인도 아니고 관계인도 아닌, 초등학생 한정희 사이에서 벌어진 찜찜한 사건을 통해서다.

이씨 소설이 진지해진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광주광역시로 내려간 2008년 무렵이 분수령이었다. 바보 같지만 고결한 캐릭터 나복만을 내세운 2014년 장편 『차남들의 세계사』에서 그가 문제 삼은 건 전두환 정권 시절 자행된 끔찍한 국가폭력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씨 소설은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았다. 단순히 웃기는 작가에서 ‘의식 있는’ 작가로, 이야기꾼에서 소설가로, 이기호는 왜 변했나.

이씨는 “두 번째 소설집(『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2006년), 첫 번째 장편(『사과는 잘해요』, 2009년)을 낼 때까지만 해도 소설 구성에서나 문장에서나 가능하면 전통적인 소설 작법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한국 작가들의 이상한 인문학 숭배 습성, 선생님 노릇하려는 모습이 싫었고, 소설 뭐 있어, 이야기가 전부 아냐, 라고 공공연히 얘기하고 다니던 시절이다.

광주에 내려가며 삶의 질은 좋아졌다. 안정적인 교수 월급이 나오고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사람들 한 번 웃게 만들어보자, 하고 정신 없이 쓰다 보면 아, 내가 이거 미친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MB, 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주변에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고, 학생들도 암울한 시기에 작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데, 아무리 웃기는 이야기꾼이라지만 소외된 사람들의 얘기를 쓸 때면 거짓말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별 문제 없이 잘 사는 내가 남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하는 건가, 삶과 문학 사이에 괴리를 느꼈다는 거였다.

‘한정희와 나’는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아예 이기호라는 이름의 소설가를 소설에 등장시켜 난관을 맞닥뜨리게 한다. 그 난관 앞에서 이씨를 닮은 소설 속 이기호가 겪는 고통은 진짜에 가깝지 않겠느냐는 거다. 인물과 에피소드는 물론 꾸며낸 거지만 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씨 소설이 더이상 웃기지 않는 건 아니다. 당장 『차남들의 세계사』는 알싸한 희비극, 올해 출간한 가족소설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에서도 웃음이 잔뜩 묻어났다.

웃기는 비결이 뭘까. “나는 글을 쓸 때 나르시시즘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작가들이 글 쓰다 보면 스스로에 도취돼 자꾸 아름답게 쓰거나, 보다 깊숙하게 인간 내면을 그리려는 경우가 많은데 자기는 그런 게 없다는 얘기였다. 작가가 우스꽝스럽거나 젠체 하지 않는 의외의 모습에 독자들이 웃음을 터뜨린다는 거였다.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소박한’ 작가의식이 깔려 있다. 작가는 영감을 받아 작품을 쓰거나 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남들보다 좀 더 앓고 좀 더 깊게 느끼는 정도라는 얘기다. ‘한정희와 나’ 속의 이기호는 그런 고민으로 몸살을 앓는 중이었다.

■ ◆이기호

「1972년 강원도 원주 출생. 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 등, 장편 『사과는 잘해요』. 이효석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현재 광주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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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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