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세상에 이런 연극도..오늘 처음보는 대본으로 연기하는 배우들

입력 2017.09.21. 22:45 수정 2017.09.21. 22:49

연극 공연 날짜와 장소, 배우는 정해졌는데 연출은 없다.

이런 연극이 세상에 어디 있나 싶겠지만 21일 저녁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하얀토끼 빨간토끼'에 출연한 원로배우 손숙이 실제 마주한 상황이다.

이날 연극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프로그램 디렉터인 연출가 이병훈이 대본이 든 봉인된 봉투를 손숙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 연극은 각 나라에서 공연될 때마다 최고 수준의 배우가 출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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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 '하얀토끼 빨간토끼' 첫 공연
연극 '하얀토끼 빨간토끼' 출연 배우들[SPAF 홈페이지]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연극 공연 날짜와 장소, 배우는 정해졌는데 연출은 없다. 배우는 무대에 서기 전까지 대본을 보지 못한다. 대본을 보지 못했으니 물론 내용도 모르고 리허설 같은 것도 없다. 배우는 무대에 오른 뒤에서야 비로소 대본을 전달받는다. 배우는 처음 본 대본을 읽어나가며 대본의 지시에 따라 즉흥적으로 연기를 펼쳐야 한다.

이런 연극이 세상에 어디 있나 싶겠지만 21일 저녁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하얀토끼 빨간토끼'에 출연한 원로배우 손숙이 실제 마주한 상황이다.

이날 연극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프로그램 디렉터인 연출가 이병훈이 대본이 든 봉인된 봉투를 손숙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봉투를 열기 전 손숙은 "50년 배우 인생에 처음 겪는 황당한 상황이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서 출연제의가 왔을 때 수락했다"면서 "주최측에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아무것도 알려하지 말라'고 했다"고 소개했다.

이 공연에서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본이 있긴 하지만 배우는 대본을 수동적으로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중간중간 자기 생각을 덧붙일 수도 있다. 무리해보이는 대본의 내용에 난감해 하기도 하고 어처구니없어하기도 한다. 현장에서 배우의 즉흥적 반응에 따라 극은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

연출도, 무대 세트도 없는 이 연극의 또다른 주체는 관객이다. 불 꺼진 관객석에서 조용히 숨죽여 공연을 바라보기만 하는 여타 다른 연극과는 달리 이 연극은 공연 내내 관객석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 관객들은 침묵을 지킬 필요가 없다. 배우가 질문하면 답도 해야 하고 때로는 손도 들어야 한다. 심지어는 휴대전화로 사진도 찍을 수 있다. 관객은 무대로 나가 배우를 도와 극을 진행하는 역할도 한다. 관객들의 참여가 없으면 극은 진행되지 못한다. 관객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느냐에 따라 맥빠진 공연이 되는지, 활기찬 공연이 되는지가 결정된다. 이날 무대에는 공연을 보러 온 문화체육관광부 고위 간부가 올라오기도 했다. 요즘 공연계에 유행하는 관객 참여형 공연인 '이머시브'(Immersive) 공연의 한 형태다.

이같은 색다른 공연 형식은 대본을 쓴 이란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36)의 배경에서 비롯됐다.

그는 징병제 국가인 이란에서 병역거부로 여권이 취소돼 외국 여행을 금지당했다. 술리만푸어는 이후 고립된 시간 속에서 전 세계의 배우와 관객들을 만나겠다는 생각으로 2010년 영어로 이 작품을 썼다. 작품은 2011년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과 토론토 섬머워크 페스티벌에서 초연됐고 이후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돼 32개국에서 공연됐다. 연극에는 술리만푸어 자신의 이야기가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해 배우와 관객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SPAF 홈페이지]

이 연극은 각 나라에서 공연될 때마다 최고 수준의 배우가 출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손숙을 시작으로 이호재, 예수정, 하성광, 김소희, 손상규까지 연기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배우들이 각각 한 차례씩 무대에 선다. 뒷차례 공연하는 배우는 앞선 공연을 볼 수 없는 것도 연극의 규칙이다.

즉흥극인 만큼 공연 시간도 들쭉날쭉하다. 첫날 공연은 1시간 15분 정도 진행됐지만 이후 손숙과 관객들이 극에서 나온 내용을 화두 삼아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오후 8시 시작한 공연은 9시40분쯤 마무리됐다.

손숙은 공연이 끝난 뒤 "사실 공연을 앞두고는 사흘 전부터 망신당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잠이 안 왔고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토로했다.

그는 "(관객에게) 재미있었냐고 묻기에는 당황스럽지만 공연하고 나니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작품을 썼는지 이해가 됐다"면서 "연극일 수도, 연극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어 즐겁다"고 소감을 밝혔다.

제17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기획공연으로 마련됐다. SPAF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힌 연극은 24일까지 이미 전 공연이 매진됐다.

zitron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