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 능행차' 59.2km 최초 재현..정조는 왜 융릉에 갔나

강지은 2017. 9. 2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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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강지은 기자 = 서울 창덕궁에서부터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화성 융릉까지 '59.2㎞'.

【수원=뉴시스】 이정선 기자 =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기념한 ‘제53회 수원화성문화제’가열린 가운데 9일 오후 경기 수원 장안문 인근에서 조선 22대 정조대왕 능행차가 재연되고 있다. 2016.10.09.ppljs@newsis.com

당시 8일간 이어진 머나먼 여정의 능행차에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가 해마다 나선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장조)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장조는 1735년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나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됐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해 3세가 되었을 때 이미 '효경'을 외울 정도였다. 수시로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다양한 방면에서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부왕인 영조의 기대가 매우 컸다.

그러나 1749년 그를 경계하는 노론 벽파 대신들이 왕세자를 모함, 영조와 왕세자 간의 갈등이 비롯됐다.

특히 1762년 형조판서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던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하는 상서를 올리자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왕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한다.

하지만 왕세자는 이를 따르지 않았고 영조는 그를 뒤주에 가두었다. 왕세자는 뒤주에 갖힌 지 8일 만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모든 비극을 어린 나이에 목격한 정조는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당쟁의 와중에서 어렵게 25세의 나이로 국왕에 즉위, 수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한다.

'능행차'는 이러한 개혁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정조는 1789년 아버지의 묘를 동대문구 배봉산에서 현재의 자리인 화성 융릉으로 옮기고, 해마다 1월 또는 2월 아버지를 참배하기 위해 화성을 방문한다.

그러나 정조의 능행차는 단순히 참배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정조는 행차할 때마다 화성에 머물며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고, 한 차례의 행차마다 수십 건의 민원을 처리했다.

실제로 '원행을묘정리의궤'는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기 위해 8일 간의 화성 행차를 진행했던 기록을 담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1795년 윤2월9일 오전 화성 행차에 나선다. 1㎞에 달하는 현란한 깃발과 연주가 어우러진 국왕의 행렬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출발해 보신각 앞길을 지나 숭례문을 통과한 뒤 노량진 배다리에 다다른다.

【서울=뉴시스】전진우 기자 = 서울시는 수원시, 화성시와 함께 이번 주말 1795년 을묘년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기 위해 가던 능행차 행사를 펼친다고 21일 밝혔다.다음은 정조대왕 능행차 진행 경로. 618tue@newsis.com

배다리를 건너는 동안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고, 백성들은 국왕의 행렬을 축제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정조는 이러한 능행길에서 백성들과 소통했다.

'정조실록' 1792년 1월24일 기사에는 '왕이 행차하는 도중 갈현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초상에 앉아 마을 노점의 노인들을 불러 고통스러운 일을 물어보았다'라고 기록돼 있다.

1793년 1월12일 기사에도 '왕이 인덕원 들녘을 지나다 길가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위로하며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긴 행렬이 도착한 화성에서는 혜경궁 홍씨의 성대한 회갑연이 열렸다.

그런데 정조는 왜 어머니의 회갑연을 도성이 아닌 화성에서 열었을까. 그리고 왜 대규모 행렬을 이끌었을까.

실제로 능행차에는 6000여명의 사람과 788필의 말이 동원됐다.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24개 처의 요지에 배치된 수천 명의 복병까지 계산하면 1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된 셈이다.

이는 비극적인 아픔과 혼란스러운 당쟁 속에서 즉위한 정조가 자신의 입지를 지키고, 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이었다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군복을 입고 말을 타는 위엄한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1800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조선을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미완의 개혁정치가'로 역사에 남았다.

한편 서울시는 23일부터 24일까지 수원시, 화성시와 함께 창덕궁에서 화성 융릉까지 정조대왕 능행차 59.2㎞ 전 구간을 최초로 재현한다.

kkangzi8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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