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트럼프의 '완전파괴', 부시 '악의 축'과 닮은꼴

워싱턴/조의준 특파원 입력 2017.09.21. 03:14 수정 2017.09.2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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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완전 파괴' 단어 직접 골라.. 안보팀 조율 거쳐 작심발언]
美언론 "2002년 부시, 이라크 맨먼저 언급한 연설 1년후 공격
트럼프 유엔연설은 北을 맨앞에 언급, 당시 상황과 매우 비슷"
美공군 "오늘 밤이라도 출격"
매티스 국방은 외교해법 강조.. 北과 협상 여지 열어둬
- 美언론·정치권 평가 엇갈려
WP "깡패 두목 말처럼 들렸다"
볼턴 前유엔美대사 "최고 연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현지 시각)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북한을 겨냥해 "미국과 동맹국들을 방어해야 한다면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는 순간 총회장에는 냉기가 흘렀다. 트럼프 대통령이 '불량 정권(rogue regime)'이라고 지목한 북한·이란·베네수엘라 측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대표단도 심각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생방송 TV 카메라에 잡혔다.

자리 박차고 나가는 北 - 19일(현지 시각) 자성남 유엔 주재 북한 대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유엔 연설에 앞서 총회장을 떠나고 있다. /AP 연합뉴스

USA투데이는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연설은 (지난 2002년 1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악의 축' 국정 연설의 업데이트 버전"이라고 썼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북한·이란 세 나라를 핵과 미사일 등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는 '악의 축'으로 꼽았다. 이라크를 향해선 "대량 살상 무기로 동맹을 공격하거나, 미국을 협박할 수 있다"며 "이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무관심 대가는 비극적"이라고 했다. 미국은 이듬해인 2003년 3월 이라크를 공격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불량 정권'으로 북한·이란·베네수엘라 세 나라를 거론했다. 그는 "북한은 엄청난 인명을 죽일 수 있는 핵과 미사일을 무모하게 추구하고 있다"며 "모두(국제사회)가 힘을 합쳐 북한 김정은을 고립시켜야 한다"고 했다.

2002년 '악의 축' 가운데 이라크를 가장 먼저 언급했던 부시 전 대통령은 2003년 3월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은 48시간 내 이라크를 떠나라"는 선전포고와 함께 전쟁을 개시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불량 정권' 중 북한을 가장 먼저 거론하며 "로켓맨(김정은)이 자신과 그의 정권에 자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핵·미사일로 폭주하는 북한에 대해 미국의 군사행동 시계가 빨리 돌아가고 있음을 경고한 것으로 풀이된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준비된 원고를 그대로 읽었다"면서 이날 발언이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합의된 정책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미 공군의 폭격기 운용을 책임지는 지구권타격사령부 로빈 랜드 사령관은 이날 "우리가 빙빙 돌려서 얘기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오늘 밤 출격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고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보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에도 미 언론 인터뷰 등에서 '화염과 분노' '군사 해법 장전' 등의 강경 발언으로 세계를 긴장시켰다. 그러나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북한에 대해 '완전한 파괴' '로켓맨(북한 김정은)의 자살 임무' '타락한 정권' 등을 언급한 것은 무게가 다르다는 평가다. 트럼프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 등 발언은 다분히 우발적 요소가 있었으나, 유엔 연설은 미 외교·안보팀과 사전 조율을 거친 뒤 프롬프터를 보며 또박또박 읽어내린 미국의 공식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번 연설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 외교·안보 수뇌부가 최근 잇따라 "필요하다면 군사 옵션 준비를 대단히 서둘러야 한다"고 말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백악관 관계자는 "대통령이 직접 표현을 가다듬고, 미세 조정을 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썼다"고 했다. 완전 파괴, 자살 임무, 로켓맨 등의 단어는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고른 것으로 알려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한 외교관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 연단을 대북 선전포고에 이용했다"고 말했다. 북한의 자성남 유엔 주재 대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연단에 오르자 바로 앞좌석을 박차고 일어나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미국은 준비돼 있고 의지와 능력도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필요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매티스 국방장관도 이날 기자들과 만나 "북한 문제가 외교적 수단을 통해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는 북한에 협상 여지를 열어놓으며 북한의 결단을 촉구한 것으로 보인다.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미 공군 폭격기 운용을 책임지는 지구권타격사령부 로빈 랜드 사령관이 이날 "우리는 매우 짧은 시간에, 먼 거리에 폭격기를 출격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에 대해 미국 언론과 정치권의 평가는 크게 엇갈렸다. 워싱턴포스트(WP)는 "완전 파괴는 북한 2500만 주민의 생명까지 김정은과 함께 절멸하게 될 것이라는 신호"라며 "미국 대통령의 말이 '깡패 두목(mob boss)'의 말처럼 들렸다"고 했다. 뉴욕타임스도 "국내에서 하던 투쟁형 연설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에서 했다"고 말했다. 반면,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북한의 제거는 미국과 동맹을 보호해야 할 경우에만 일어난다고 선을 그은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도 부글거렸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우리는 북한 지도자가 변덕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런(로켓맨) 종류의 표현은 위험하다"고 했다. 상원 외교위 민주당 간사인 벤 카딘 의원은 성명에서 "선동적이고 무책임한 협박은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을 약화시킬 뿐"이라고 했다. 반면 존 볼턴 전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이보다 더 명확하고 직접적일 수 없는 최고 연설"이라고 했고, 린지 그레이엄 상원 의원(공화)도 "북한에 대한 강한 경고가 굉장히 인상적"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말'만으로 판단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더글러스 팔 카네기 평화연구소 부원장은 "미국이 엄청난 보복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트럼프식 표현"이라고 했다. 한미경제연구소의 마크 토콜라 부원장도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사회에 대북 압박을 도와달라고 호소했고, 이는 거친 수사와 상관없는 현실적인 접근법"이라고 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자신의 '미국 우선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주권(sovereignty)이라는 단어를 21번이나 사용했다. 지난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유엔 연설에서 국제사회의 공조를 강조했었다. 이날 40여 분간의 트럼프 대통령 연설에서 박수는 6차례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일부만 박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