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다리 굵으면 연애도 못하나요?

2017. 9. 20.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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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째 소개팅만 하고 있는 내 '남자사람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리고 만남 그 몇시간 후에, 모든 것이 지워지고 고작 '다리 굵은 여자'로 기억되고 말았을 내 '여자사람 친구'가 내게 물었다.

여자의 가슴은 제2의 성기이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글은 있어도, 남자 성기의 이상적인 모양이나 사이즈를 다룬 글 같은 건 눈을 씻고 봐도 없다니.

배 나온 남자사람 친구가 내 여자사람 친구의 다리 굵기를 지적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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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SC] 곽정은의 '이토록 불편한 사랑'

한 여성이 서울의 한 지하철 역사 안에 설치된 성형외과 광고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다른 건 모르겠는데, 아! 멀리서 걸어 들어오는데 일단 다리가 너무 굵더라고. 나름 이야기가 잘 통하긴 했는데, 그냥 다리 좀 얇은 여자로 다시 소개해주면 안 돼?”

몇년째 소개팅만 하고 있는 내 ‘남자사람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리고 만남 그 몇시간 후에, 모든 것이 지워지고 고작 ‘다리 굵은 여자’로 기억되고 말았을 내 ‘여자사람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 사람 나쁘지 않았어. 근데 연락할 것처럼 하고선 안 하더라.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나 요즘에 전체적으로 살이 좀 붙긴 했는데 다이어트를 더 해야 할까?”

오랜만에 주선한 소개팅이 나에게 남긴 것은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이런 풍경이었다. 물론 누구나 취향은 있고, 누구나 자기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날 자유는 있다. 게다가 우리의 외모는, 우리의 디엔에이(DNA)와 처한 환경 등 많은 정보를 반영하며, 인류는 2세를 더 잘 낳아줄 건강한 디엔에이를 가진 여자, 2세를 더 잘 키워줄 남자를 찾기 위한 본능이 강화되었다고 일부 진화심리학자들은 설명해왔다.

하지만 나는 이 씁쓸한 풍경 앞에서 좀 다른 의문이 들었다. ‘취향은 자유라지만, 정말 그 취향은 독립적이며 순수한 동물적 본능이기만 할까?’

한때 보건복지부가 운영했던 ‘국가건강정보포털’(지금의 질병관리본부 국가건강정보포털) 누리집에는 ‘이상적인 가슴의 조건’이라는 글이 올라와 많은 항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상적인 유두(젖꼭지)의 위치와 유륜(젖꼭지 둘레에 있는 동그란 부분)의 색깔까지 상세히 설명한 충격적인 글을 무려 정부 부처에서 배포했던 셈이다. 여자의 가슴은 제2의 성기이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글은 있어도, 남자 성기의 이상적인 모양이나 사이즈를 다룬 글 같은 건 눈을 씻고 봐도 없다니. 발기했을 때 5㎝만 되어도(저기, 뭐라고요?) 여자가 만족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감언이설이 받아들여지는 나라에서 질 축소 수술, 소위 ‘예쁜이 수술’을 하는 여자들은 또 존재한다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여자에게는 훨씬 많은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강요되고 또 받아들여진다.

여성스럽고 너무 세지 않은 이목구비, 풍만하며 처지지 않은 가슴과 잘록한 허리, 쭉 뻗은 팔다리와 그 아래로 곱게 정리된 손톱과 발톱까지 여성의 몸은 조각조각 ‘여성으로서 적절한지’ 평가받는다. 배 나온 남자사람 친구가 내 여자사람 친구의 다리 굵기를 지적했듯이. 내가 방송에 출연하고 나서 외모 때문에 숱하게 악플을 받아야 했듯이.

티브이를 볼까. 배 나오고 못생긴 남자 방송인은 얼마든지 쉽게 진행자 자리도 꿰차지만, 그런 여성 방송인은 가뭄에 콩 나듯 보인다는 건 꽤나 상징적이다. ‘남자는 원래 여자를 볼 때 외모를 가장 많이 보는 거야’라는 말은, 그저 남자의 취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남녀 간 대등한 경쟁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에서, 여성에게 허락된 노력은 딱 그 정도가 적절하다는 씁쓸한 상징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상징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 듯 보인다.

‘여자가 그러면 사랑받기 힘들지, 여자가 그 정도 관리는 해야지’라는 흔한 말들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밥을 굶어가며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외과를 찾아 수술대에 눕는 것일까?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좀 나아진 외모를 갖게 됐지만 오히려 떨어져버린 자존감을 가지고 만나게 된 사람과 하게 되는 연애란 얼마나 별로일까! 자기 몸의 주인도 되지 못했는데 상대방과 평등하게 사랑하고 교감할 수 있을까? 튼튼한 다리의 내 친구가 괜찮은 남자와 이어질 확률은 얼마나 있는 것일까?

곽정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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