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AS] '꿈' 볼모로 미성년 성폭행..배용제 시인 판결이 남긴 것

박다해 2017. 9. 20.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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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AS][뉴스AS] '징역 8년 선고' 판결문 단독 입수·피해자 단독 인터뷰
“피고인을 징역 8년에 처한다. 피고인에 대하여 20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한다.”-9월 1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9부(재판장 김수정) 배용제 시인에 대한 판결이 지난 12일 선고됐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고양예술고등학교에서 ‘시 창작’ 과목 전공 실기 교사로 근무하며 미성년 제자를 여러 차례 성추행, 성폭행을 한 혐의(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로 구속기소된지 반 년 만이다. 지난해 10월 트위터를 중심으로 ‘#문단_내_성폭력’ 고발운동이 확산된 뒤 처음으로 가해자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배씨는 선고 직후 항소 의사를 밝혔고, 15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문화계·법조계에선 “의미 있는 선례”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개인의 처벌에만 그칠 경우 제2, 제3의 가해자가 나올 수 있다는 우려가 뒤따른다. <한겨레>는 피해자 인터뷰와 판결문을 통해 이번 사건을 재구성했다. 이번 판결의 의미를 짚고 문단을 포함, 영화·미술계 등으로 번졌던 문화계 성폭력 사건의 해결책을 모색한다.
출판사 창비는 지난 2월 ‘문단 내 성폭력’ 사태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창비 제공

■ 피해자 ㄱ의 이야기 “성범죄 피해자가 합의를 해도 ‘꽃뱀’이 되지 않아야 한다”

ㄱ은 가끔 벌떡 일어나 무작정 달렸다. 일부러 불편한 옷을 입고, 무거운 짐을 싸들고 뛰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가해자를 맞닥뜨렸을 때 최단 시간 내에 최대로 도망칠 수 있는 거리를 가늠해봤다. 지난해 10월, 트위터로 성폭행 피해사실을 고발한 뒤 생겨난 버릇이었다. 고발글을 익명으로 썼지만, 가해자는 읽는 순간 ‘나’라는 걸 바로 알 것 같았다. 가해자는 ㄱ이 어느 학교, 어떤 과에 재학하는지도 알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을 찾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가해자를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도망쳐야 했다. 스트레스였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내가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불안에 시달렸다. “만나면 그냥 쌍욕을 해버리자” 무모한 생각으로 견뎠다.

“나는 갑자기 가장 불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카디건을 덧입고 꽉 끼는 레깅스 위에 치마를 입은 뒤 구두를 신었다. 마지막으로 온갖 짐을 넣어 무겁게 만든 가방을 멨다. 나는 그 상태에서 마구 뛰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 잘 도망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한참이나 뛰었고 누군가와 부딪히고서야 멈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울먹였다. 숨이 차서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당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참고문헌없음-이 글은 필터링된 글입니다> 33쪽

재판에선, 진술이 끝나자 크게 할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재판이 진행 중이란 사실 자체가 ㄱ에겐 항상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하루에 한 번씩 거사를 치르는 것 같았다. 마음의 체력이 많이 닳았다. 스쳐 지나가는 일상에도 과하게 에너지를 끌어써야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가족은 ㄱ의 피해사실을 몰랐다.

“성폭력은 더 이상 개인의 일로 그치면 안 된다”고 ㄱ은 말했다. 문단 또는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학교, 직장 등 너무 많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ㄱ은 “폐쇄적인 분위기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짚었다. 폐쇄성은 위계와 권위를 자리잡게 한다. 공론화는 어렵게 만든다. 그 안에서 자책하거나, 책임을 지고 떠나는 이들은 대개 피해자다. ㄱ은 “앞으로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속한 공동체가 모두 책임지도록 개선돼야 한다”고 했다. 또 “피해자가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재판 과정을 원하는 피해자도 있고, 합의를 하고 싶은 피해자도 있을 수 있다. “‘합의’를 선택한다고 해도 그들이 ‘꽃뱀’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야 한다”고 ㄱ은 말했다.

문화예술계에서 ‘성(性)’이, 성폭력이, 여성의 신체가 빈번하게 예술적으로 승화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ㄱ은 거대한 단체가, 그들이 갖고 있는 권력을 자각하고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ㄱ은 여전히 문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가해자에게 징역 8년이 선고됐다. 항소가 남았지만 일단 큰 일 하나를 끝낸 것 같아 기분이 좀 낫다.

■ 피해자 ㄴ의 이야기 “법 위에 예술 없고, 피해자 위에 예술 없다”

ㄴ은 문학을 등졌다. ‘문단’에 대한 염증이 컸다. 피해 사실을 밝혔을 때 놀라고 같이 분노한 사람도 있었지만 “원래 그렇다더라”는 답도 돌아왔다. 이미 문단에 속해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풍토처럼 자리잡고 있는 곳에선 목소리를 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관두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ㄴ은 전했다.

처음엔 고발을 하는 것 자체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누가 내 말을 들어줄까, 내가 드러나진 않을까’란 두려움이 컸다. 마음을 먹은 건 가해자가 “고등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 그곳 아이들과 사귀기도 했다”고 말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다. “더 이상 그렇게 떠들도록 두기 싫었어요.”

ㄴ이 고소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법률 상담을 받아도 증거가 없기 때문에 고소를 못한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문제 해결을 시작도 못한다는 박탈감에 정신과 약을 먹고, 살기 위해 심리상담을 받았다. 그러다 마주친 ‘#문단_내_성폭력’ 고발은 마지막 기회였다.

6개월 동안 진행된 재판에서 세 번의 순간이 기억에 남았다. ‘증인’으로서 법정에 처음 나가 가해자를 마주하고 증언을 했을 때, 가해자를 두둔하는 증인이 나타났을 때, 그리고 선고를 직접 들었을 때다.

“검사의 질문에 ‘예’하고 대답할 때마다 ‘내가 받은 피해가 생각보다 많구나’ 싶어서 울 것 같았어요. 가해자는 (제게도) 들릴 정도로 한숨을 쉬거나 미간을 찌푸리고, 인상을 쓰거나 가끔 하늘을 바라봤죠. 엄청나게 억울하다는 제스처만 넘쳐났어요. 그런 모습에 더 이를 물고 (증언에) 집중했습니다.”

남자 문인도 아닌 같은 학교 여자 선배가 가해자를 두둔하는 증언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어안이 벙벙했다. 이후 그 선배는 피해자 쪽에 연락해 “죄책감을 느낀다”며 증언을 번복했다. 혼란스러웠다. 8년 형을 선고받고, 울먹이는 가해자의 모습을 봤다. ‘내 앞에선 그렇게 억울해하더니 법 앞에서야 (비로소) 눈물을 짓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나면서도 마음의 응어리가 풀렸다.

문단 내 성폭력 사례를 기록하고

“나는 이것으로 피해사실을 내 인생의 한 장으로 덮어두고, 남은 시간을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ㄴ은 생각한다. “법 위에 예술 없고, 피해자 위에 예술 없다”고 말이다. 1심 선고가 나는 날까지, 함께 용기를 내고 증언석에 서 준 사람들이 있다. “안면도 없는 사람들의 도움은 제게 기적이었어요. 사실 (고양예고 성폭력 피해고발자 모임인) ‘고발자5’는 매우 운이 좋은 편이었죠. ‘참고문헌없음’ 프로젝트를 통해 후원을 받아 법적 대응도 가능했잖아요.”

‘참고문헌없음’ 프로젝트는 문단 내 성폭력 사례를 기록으로 남기고, 피해고발자들에 대해 법률 비용과 의료비를 지원하는 기금을 마련한 크라우드 펀딩이다. 당시 시작 8시간 만에 목표액인 2000만원이 모였다. 전체 모금액은 무려 6200만원에 달했다. ㄴ은 “혼자 했더라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인정받는 게 어려운 과정에서 함께 해 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더 많은 사건이 양지에 드러나고 응당한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 반복된 성폭행은 어떻게 가능했나

배용제 시인은 고양예고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손금을 봐주겠다”며 손을 잡아끈 뒤 “손금을 보면 너의 가슴과 성기의 모양이 다 드러난다”고 말하곤 했다. 악수를 하듯이 손을 잡고선 손가락으로 학생의 손바닥을 긁었다. 성관계를 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다리가 예쁘니 짧은 것만 입고 다녀라”, “속옷이 다 보인다”, “가슴이 되게 예쁠 것 같다” 입버릇처럼 성희롱 발언을 일삼았다. 자신의 창작실로 학생들을 불러 강제로 입을 맞추고 추행했다. 지역에서 열린 백일장 대회에 참가한 학생에게는 “늦게 끝나니까 부모님께 친구 집에서 자고 간다고 말하라”고 시킨 뒤 성폭행을 했다.

“피고인은 평소 피해자들에게 수시로 ‘나에게 배우면 대학에 못가는 사람이 없다. 나는 편애를 잘 하니 잘 보여라. 글을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대학 교수보다도 나에게 배우는 것이 낫다. 내가 고등학생뿐만 아니라 대학생과 성인을 상대로도 등단반을 운영하고 있고 문단과 언론에 아는 사람이 많다. 내가 사람 하나 등단을 시키거나 문단 내에서 매장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다’라는 등으로 입시와 문학계 등단에 대한 피고인의 영향력을 과시하였다.” -판결문

범죄가 반복될 수 있었던 건, 배씨의 권력 때문이다. 학생들이 ‘문학특기자’ 특별전형 등을 통해 대학교에 입학하려면 백일장 등 수상경력과 전공 교사의 추천서가 필요했다. 일부 주요 대회의 출전 인원은 제한됐고, 전공 교사에게 추천권이 있었다. 피해자들은 재판에서 “피고인이 지도하는 학생이 백일장이나 입시에서 좋은 성과를 거뒀다”, “피고인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면 학교에서든, 향후 문단에서든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피고인은 학생들을 편애하고 배척된 선배, 학생에 관하여 험담을 한다”고 진술했다. 꿈을 위해선, 배씨의 요구에 반항하기 어려웠다.

재판부는 배씨의 혐의 대부분을 유죄로 인정하며 “피고인은 피해자들과의 ‘관계적 요인’을 피해자들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고 이에 대한 피해자들의 항거와 반항을 점차 무력화하는데 활용했다”고 지적했다. 배씨는 “아이들이 싫어하지 않았다. 합의 하에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피해자가 거세게 반항하지 않았다거나 다소 순응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하여 피해자들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충분히 행사하여 피고인의 성행위를 받아들였다고 볼 수는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피해자들의 법률지원비용과 의료비를 모은 ‘참고문헌없음’ 프로젝트.

■ “독점적·폐쇄적인 권력구조 개선돼야 제2의 피해자 안 생길 것”

검사가 구형한 13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번 판결은 대체로 “좋은 선례를 남겼다”는 평이다. 하지만 이번 일을 ‘개인의 일탈행위’로 규정하고 일부 가해자에 대한 처벌에 그칠 경우, 제2의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피해자들의 법률지원을 담당했던 이선경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대입’과 ‘등단’이란 미성년자들의 꿈과 절실함을 이용한 범죄”라며 “해당 범죄가 가능했던 건 폐쇄적이고 권력이 집중된 문단 구조 때문이다. 독점적인 권력 구조가 개선되지 않으면 피해자는 계속 양산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문단_내_성폭력’ 고발이 이어질 당시 피해자는 대부분 등단을 꿈꾸는 작가지망생이었다. 한 사람이 지망생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공모전 심사위원이나 출판사 기획위원 등을 겸할 수 있는 구조다 보니, 이들은 범죄가 일어나도 쉬쉬하게 됐다고 밝혔다. 여러 문학상의 심사위원이 중복되는 점도 마찬가지다. 일부 힘있는 문인과 출판사에 권력이 집중되고 ‘그들만의 카르텔’이 공고해지면, 침묵이 자연스러워진다.

한 출판계 관계자는 “이런 문제가 발생할 경우 한 작가 또는 출판사에 이의제기를 하면, 그게 곧 전체 출판사를 대상으로 싸우는 행위가 된다”라며 “성폭력 고발 이후 처음엔 사과했던 가해자들이 나중에 피해자들을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는 사태가 발생해도 출판계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법조계 내부에서도 문단의 폐쇄적인 권력구조에 대해 개선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는 ‘문단 내 인권침해 실태조사를 위한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하고 제도적인 개선 방안을 논의 중이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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