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만취해 준강간, 피해자 '블랙아웃' 가능성으로 무죄?"

이재덕 기자 2017. 9. 2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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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 19일 서울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에서 개최한 ‘피해자 권리 상실 삼각지대, 준강간’ 토론회에서 여성단체 활동가들은 “준강간 사건이 피해자의 블랙아웃 가능성을 근거로 부인돼서는 안되며 사건 전후 구체적인 정황, 가해자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성관계에 대한 합의를 구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재덕 기자

ㄱ씨는 2014년 7월 한 남성과 데이트를 하면서 주점에서 소주 4병과 에너지 드링크를 섞어 마셨다. 1시간 반 뒤 ㄱ씨는 술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됐다.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고, 신발과 양말은 벗겨져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성은 ㄱ씨를 부축해 근처 모텔로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에 정신을 차린 ㄱ씨는 자신이 남성과 옷을 벗고 침대에 함께 누워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성기가 쓰리고 아팠다. 혼자 모텔에서 빠져나온 뒤 남성에게 전화를 걸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성관계를 했나’, ‘콘돔을 사용했나’ 등을 물었다. 다음날에는 남성과 함께 병원에 가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았다.

ㄱ씨는 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을 받은 뒤 해당 남성을 준강간 혐의로 고소했다. 형법 299조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판단력을 완전히 잃거나 저항하지 못하는 상태)를 이용해 간음 또는 추행하는 것을 ‘준강간’으로 규정해 처벌한다. 법정에서는 주점과 모텔 폐쇄회로(CC)TV 영상이 증거로 제시됐다.

하지만 이듬해 9월 1심은 물론 지난해 7월 2심도 남성을 ‘무죄’로 판결했다. ‘ㄱ씨가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의 상태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남성 측 변호인 논리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재판부는 남성의 목에 남은 키스 자국 등을 근거로 “(모텔에 들어갔을 때는 인사불성이었지만) 성관계 전후 상황을 인식하고 의식적인 행위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의식적인 행위를 했지만 나중에 기억을 못하는 일시적 기억상실증인 ‘블랙아웃(Black Out)’ 증상일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 19일 서울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에서 개최한 ‘피해자 권리 상실 삼각지대, 준강간’ 토론회에서 여성단체 활동가들은 “준강간 사건이 피해자의 블랙아웃 가능성을 근거로 부인돼서는 안되며 사건 전후 구체적인 정황, 가해자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성관계에 대한 합의를 구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피해자가 피해 경험을 정확하게 기억하기 어려운 준강간 사건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피고인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준강간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덮어쓸 수 밖에 없다”며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 자체를 부정당할 뿐 아니라 마치 피해자가 기억을 똑바로 하지 못해서 억울한 피고인을 만들어낸 것처럼 결론이 나게 된다”고 말했다.

패널로 나온 의사 이원윤씨는 “블랙아웃 상태에서 피해자가 완벽하게 정상적인 의식을 가지고 온전한 상태에서와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피해자의 항거능력은 필연적으로 심각하게 저하됐거나 소실됐다고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영지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준강간 사건에서 피해자들은 본인이 경험한 것이 준강간이라고 판단하기까지도 시간이 걸리며, 본인의 기억에는 분명히 없는데 동의한 성관계였다거나 또는 ‘네가 더 적극적이었다’는 상대방의 주장으로 인해 피해에 대해 정확히 규정하지 못하기도 한다”면서 “우리 사회에는 피해자 유발론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에 피해자들은 내가 오해할만한 행동을 취한 것은 아닌지, 술 취한 자체가 잘못은 아닌지와 같은 자책에 시달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은의 변호사는 “재판부로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준강간사건이) 다른 결과가 나온다. 피해자의 상태를 고려하는 부분은 상당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의 영역”이라며 “누가 봐도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 분명했고 가해자가 알기 충분한 상황이었고, 피해자가 명징하게 성관계 동의를 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유죄로 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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