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맨 출신 전 주중 일본대사 "日 대북정책, 만주사변 닮았다"

김상진 2017. 9. 20.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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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집권기 중국대사 지낸 니와 우이치로
"힘 대 힘으로 해결하려 들면 반드시 전쟁 나"
전쟁 경험자 "현 일본사회, 전전의 일본 닮았다"
"만주사변 때 일본인, 팩트 아닌 페이크에 열광"
"미디어가 전쟁 부추기고, 정치가·군부가 악용"
1931년 9월 19일 새벽 일본 관동군이 이 지역 군벌인 장쉐량 군을 공격해서 펑톈성을 장악한 뒤 환호하는 모습. [중앙포토]
"일본의 대북정책이 86년 전 만주사변을 닮아가고 있다.” 니와 우이치로(丹羽宇一郎·78) 전 주중 일본대사가 북한 핵·미사일 위기에 맞서 '압박 일변도 전략, 군사적 대응 불사' 쪽에 기울어 있는 일본 보수 주류의 시각을 비판하는 기고문을 지난 18일 만주사변 86주년을 맞아 경제주간지 도요게이자이 온라인판에 실었다.

니와 전 대사는 일본 굴지의 종합상사인 이토추상사 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민주당 간 나오토(菅直人) 정부 시절인 2010년 첫 민간 출신 중국대사로 발탁됐다. 상사맨 시절 닦아놓은 그의 중국 정·재계 인맥과 경험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2년 6개월간 재임하며 북한 문제를 포함한 중·일 외교에 몰두했다.

니와 전 대사는 기고문에서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인의 반일 감정이 촉발되면서 15년간의 중일전쟁이 시작됐다"며 "(대북 문제에서도) 문제를 힘 대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들면 반드시 전쟁이 나고 만다”고 주장했다. 대북 강경론 일변도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을 사실상 정면 비판한 것이다.
만주사변 당시 남만주철도 철로 폭파사건, 이른바 '류타오거우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국제연맹의 리튼조사단 일행이 현장 조사를 하고 있다. [사진 일본 태평양전쟁연구회]
1932년 10월 만주국에 도착한 리튼조사단. 국제연맹 조사단은 만주사변이 일본의 조작이며, 만주국은 중국에 환원돼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에 불복한 일본은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중앙포토]
현재 일본 정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로는 부족하다며 미국과 합심해 북한의 돈줄을 죌 수 있는 독자제재 방안을 다각도로 검토하며 액션플랜을 짜고 있다. 한반도 위기를 계기로 한 군사적인 움직임도 잦아졌다. 지난 5월 자위대 호위함 2척이 일본 근해에서 미군 보급함을 방어한 데 이어 최근엔 자위대가 북한 탄도미사일 방어를 위해 파견된 미군 이지스함에 대한 해상 급유작전까지 했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자위대가 미군과의 신임무 수행 형태로 실전훈련을 강화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미 법제화된 집단적 자위권을 고려할 때 한반도 급변사태 시 자위대가 어떤 방식으로든 관여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니와 전 대사는 지난달 출간한 저서 『전쟁의 대문제』를 위해 인터뷰했던 전쟁 경험자들을 인용해 이 같은 분위기를 경고했다. 자살 특공대원이었던 역사학자 이와이 타다쿠마(岩井忠熊) 리쓰메이칸대 명예교수는 “94살인 내가 일본의 태도를 보면 한탄스럽다. 현대 일본사회의 모습은 전전(태평양 전쟁 전)의 일본과 닮아 있다”고 비판했다고 니와 전 대사는 밝혔다. 1931년 9월 18일 중국 펑톈(奉天·현 선양)에서 일어난 만주사변은 중일전쟁의 시작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었다. 당시 일본 관동군은 만주를 점령하기 위해 일본이 운영하던 남만주철도 노선을 폭파하고 중국에 책임을 덮어씌우는 자작극(류타오거우 사건)을 벌였다. 이를 이용해 관동군은 만주를 점령했다.
일본은 만주를 통치하기 위해 꼭두각시 정부인 만주국을 세우고, 청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다시 황제로 옹립했다. [사진 일본 태평양전쟁연구회]
이어 이듬해 3월에는 청 황실을 이용한 꼭두각시 정부 ‘만주국’을 세우고 본격적인 만주 통치를 시작했다. 국제사회는 철군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1933년 3월 국제연맹에서도 탈퇴했다. 급기야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은 1940년 독일, 이탈리아와 추축국 3자 동맹을 맺고 연합국에 맞섰다. 따라서 일본 입장에선 만주사변이 패망의 원점인 셈이다. 니와 전 대사는 “만주사변 당시 일본인은 팩트(fact)보다 페이크(fake)에 더 열광했다”면서 “미디어가 전쟁을 부추기고, 정치가와 군부가 이를 악용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고 지적했다. 당시 일본 신문은 관동군의 만주 정벌을 정당화하기 위해 “포악한 중국을 응징해야만 한다”는 논리를 폈다. 또 만주를 일본을 대공황 충격에서 헤어나게 해줄 “일본의 생명선” “왕도낙토(王道樂土)” 등으로 선전하며 반드시 차지해야만 하는 지역으로 여론을 몰아 부쳤다.
만주사변 발발 소식을 담은 1931년 9월 19일자 도쿄아사히신문.
실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신문들은 ‘쾌거’로 보도하면서 본국 허락 없이 만주로 진격한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郎) 조선군사령관을 ‘월경(越境) 장군’이라고 칭송했다. 군부가 하야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도록 상황을 몰아간 것이다. 이처럼 언론이 '항명'을 '공적'으로 돌려준 덕에 하야시는 이후 총리까지 지낼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니와 전 대사는 “실상에 눈을 뜨고 만주 무용론을 펴는 소수의 시각도 있었지만 대세를 거스르진 못했다”고 평가했다. 같은 시기 군국주의를 비판했던 언론인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의 ‘소일본주의’가 대표적이다. 자본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일본에 만주는 물론 조선·대만 등 식민지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지 않는 적자 프로젝트이므로 원상 복귀시키고 일본에 집중하자는 주장이었다.
만주사변 당시 만주로 진격한 일본 관동군. [사진 일본 태평양전쟁연구회]
그 예상대로 만주 통치의 결과는 참혹했다. 니와 전 대사는 “종전 이후 만주에 남겨진 일본인들은 비참한 상황을 맞았다”며 “전쟁 체험자들이 일본의 현 상황을 걱정하는 것은 형태는 다르지만 일본·중국의 대북 대응이 전전을 방불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2500만 국민을 이끄는 리더(김정은)를 대화도 할 수 없는 야만인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며 “대화할 여지가 있는 상대에게 힘을 써서 궁지로 모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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