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바꾸는 두 여성농민

2017. 9. 20.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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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국제농민단체 동남·동아시아 대표 상주 농부 김정열씨…
첫 청년농부 전국단체 창립 이끄는 2세 농부 강선아씨

9월5일 김정열씨가 ‘언니네텃밭’ 꾸러미 작업을 하는 경북 상주 외서면 봉강공동체 건물 앞에서 천생 농부의 넉넉한 미소를 짓고 있다. 마을의 여성농부 13명은 이날 자신이 재배한 농산물을 함께 포장해 배송 작업을 마친 뒤 다음주를 준비하는 회의를 했다.

■김정열씨 “돈 없어도 자부심”

마을 어귀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 때 묻지 않은 시골 냄새가 은근하다. 순간 초여름 여행한 부탄의 마을에 다시 왔나 착각이 들었다. 60가구가 소농의 삶을 꾸려가는 경북 상주시 외서면 봉강리 마을이다. 김정열(51)씨는 보따리 달랑 하나 들고 27년 전 봉강리로 들어왔다. 3남매를 낳아 잘 길렀으니 뼛속 깊이 봉강리 사람이 됐다. 최근 세계 최대 농민단체 ‘비아캄페시나’(농민의 길)의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대표로 선출됐다.

“전생에 농부였던 모양이에요”

“1990년 대학 졸업하고 24살 때였죠. 당시 농민운동 하겠다는 젊은 여성이 더러 있었어요. 상주농민회가 처음 만들어지고 초대 간사를 맡았습니다. 학생운동 하다 도피 중이던 남편이 지금 우리 집 구석방에서 지냈어요. 저는 아래 농민회장님 댁에서 살았고요. 1년 뒤 결혼했지요.”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농촌 출신도 아닌데 어떻게 평생 여성농부의 길을 걷게 됐나요.

전생에 농부였던 모양이죠. 남들이 물으면 그렇게 대답해요. 대학 1학년 때 농촌활동 가서 생전 처음 호미질을 했는데 일을 너무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어요. 전생에 농부가 아니고서야 그럴 수 있나요. 농민으로, 농촌에 사는 게 정말 좋아요. 농사일이 천성에 맞고, 농촌 사람들의 정서가 편해요. 봉강리 마을에 자리잡은 것도 큰 복이죠.

농사꾼 같아 보이지 않는데요.

그런 말 종종 듣지만, 봉강리에서 아이 셋을 낳아 대학까지 보냈어요. 자가와 임대를 합쳐 3~4ha(헥타르) 농사를 열심히 지었지요. 농민운동 한다면서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옳지 않잖아요.

늘 웃는 얼굴로 사람을 편안하게 대하는 김씨는 모진 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한국의 여성농민운동가다. 1990년 상주여성농민회 모태인 한마음회 총무를 시작으로, 한결같이 여성농민운동 현장의 일꾼 노릇을 했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사무총장도 했다.

꾸러미 사업하는 ‘언니네텃밭’이 전여농의 얼굴이 된 것 같아요. 그중 봉강리가 잘하는 곳이라죠.

2009년 봉강공동체를 만들어 지금도 13명이 일해요. 어르신들과 함께 꾸준히 했다는 게 가장 자랑스러워요. 언니네텃밭 꾸러미를 만드는 공동체가 전국에 15곳으로 늘어났습니다. 여성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매주 한 차례 꾸러미로 포장해 도시의 식탁으로 배송해요. 우리는 평균 월 60만~70만원의 수입을 가져가요.

언니네텃밭 사업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자본주의 대안운동이라고 생각해요. 돈이 아니라 신뢰를 중심에 두고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그런 농사로 농민이 먹고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거지요. 중앙권력이 바뀌어도 농민의 삶은 달라지지 않잖아요. 마을에 뿌리를 두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도 절감했어요. 사업상 전망이 밝지 못해요. 꾸러미가 줄어드는 추세예요.

여성농민 페미니즘은 남다르다

봉강리 사람들은 가난한데, 행복할 수 있나요.

다들 비슷하게 가난하니까 서로 도우며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 같아요. 돈 더 벌자고 비닐하우스 세우는 집도 없어요. 봉강리 사람들이 1989년 서울 여의도 농민시위에서 죽창 들고 앞장섰답니다. 상주농민회가 우리 마을에서 시작됐고, 상주에서 유기농을 처음 시작한 곳도 봉강리 마을이에요. 돈은 없어도 자부심은 대단해요.

‘비아캄페시나’ 이야기를 해볼까요.

‘농민의 길’이란 뜻인데 세계무역기구(WTO)의 농업 개방에 맞서 1993년 발족했어요. 73개국 164여 단체가 가입한 세계 최대의 국제농민단체죠. 지난 7월 스페인 바스크에서 열린 총회에 열하루 동안 각국 대표 500여 명이 모였어요. 제가 그 자리에서 동남아시아 및 동아시아 대표로 선출됐죠. 비아캄페시나의 최대 현안은 초국적기업에 맞서 농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유엔의 농민권리선언문 채택을 추진하는 겁니다. 유엔 50개 인권이사국 대다수가 지지해요. 미국만 반대하고, 한국·유럽연합·일본이 기권하는 정도입니다.

우리나라는 왜 기권인가요.

초안의 몇몇 조항이 국내법과 상충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토지에 대한 집단적 권리를 인정하고 재분배적 개혁을 촉진한다는 것, 그리고 농민의 종자 판매 권리를 보장한다는 거예요. 우리 현행법은 농민이 종자를 팔 수 없게 돼 있다나요.

소농 페미니즘 내용도 초안에 들어 있다고요.

여성농민의 페미니즘은 일반 페미니즘과 달라요. 여성농민의 현실에 맞게 나와야 하잖아요. 나라마다 사정이 달라 토론이 더 필요해요. 한국의 경우, 여성농민은 가부장적 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가장 불평등한 공간에서 지내잖아요. 그런 점에서 여성농민운동의 존재 이유는 분명하지요.

농업정책에 대한 비판이 많지요.

제일 중요한 것은 농업을 바라보는 관점,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해요. 국가에서 농업이 꼭 필요한 산업이라고 생각한다면, 거기에서 일하는 농민이 살아가게 하는 정책을 세워야죠.

■강선아씨 “청년농부 꿈 심어요”

9월7일 강선아씨가 전남 보성 벌교 ‘우리원’ 농장의 장독대 사이에 서 있다. 강씨는 유기농 명인인 부모 님 밑에서 자란 자신을 “농업계의 금수저가 아니라 금호미”라고 했다.

8월25~26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우리원’ 농장에 재기발랄한 청년농부 60명이 모였다. 청년농부와 예비 청년농부들의 자립을 위한 전국 모임을 결성하자는 왁자지껄한 발대식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청년농업인연합회’(청연)로 모임 이름을 정했다. 청연은 이르면 11월 사단법인으로 정식 창립할 계획이다. 청연의 추진위원장으로 추대된 강선아(32)씨를 벌교에서 만났다. 강씨는 우리원의 젊은 2세 대표다.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전국 청년농부 단체의 첫 출범 같아요. 왜 ‘청년농부’인가요.

정부는 젊은 인력이 농촌으로 내려가 살도록 추진하고 있어요. 그런데 유입만 신경 써요. 젊은 인력의 농촌 유입을 확산하면서도 다시 도시로 떠나는 유출을 최소화해야 해요. 어른들은 ‘참아라 참아라’ 하는데 젊은 친구들의 답답함을 풀어주지 못해요. 비슷한 어려움을 먼저 겪은 저희가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거예요.

자신감이 대단하네요.

발대식 때 청년들의 에너지가 엄청났어요. 그들이 농촌에 있는 것만으로 지역사회에 활기를 불어넣지요. 회원들의 역량만 모아도 대단한 자산이에요. 확실히 젊은이들이 만든 물품이 도시 젊은이에게 잘 팔린다는 것을 느껴요. 도시의 젊은 소비자에게 먹히는 상품 경쟁력을 갖출 수 있어요. 젊은이가 농촌에 많아지면 도시의 소비시장을 확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더 많은 젊은이가 농촌으로 들어올 공간이 열리는 선순환을 기대합니다.

주위에서 기대가 큽니다.

너무 관심이 많아서 걱정이에요. 다행히 제가 아직 결혼하지 않아서 이 일에 올인할 수 있어요. 전체 회원이 평생 즐겁게 어울려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회원 나이를 43살 이하로 제한했는데, 그 나이를 넘더라도 준회원 격인 프렌즈 회원으로 후배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할 거예요.

청년 자립을 위한 자발적 단체라고 강조했네요. 정부 지원을 받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농업계가 원체 취약하니 필요한 공적 도움은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생각과, 아무것도 받지 말고 완전 자립하자는 의견이 엇갈려요. 발대식을 우리 집에서 연 것도 순수하게 우리 힘으로 시작하자는 의지의 표현이었어요. 각자 음식을 가져와 조별로 요리 대전을 했더니, 다들 좋아하고 대화도 많아지더라고요. 앞으로 갈등 조율이 중요할 텐데요. 공동의 목표와 기준을 명확히 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회원은 얼마나 모였나요.

100명이 훨씬 넘었어요. 85%는 농사짓는 청년이고 15%는 농업 관련 코디네이터, 디자인, 유통 등의 일을 하는 청년입니다.

농업, 청년 도전의식에 부합하는 직업

2010년 작고한 강씨의 아버지 강대인씨는 국내에서 쌀 유기재배 인증을 처음 획득한 유기농 개척자이다. 어머니 전양순씨도 아버지와 함께 다양한 유기농 발효식품을 개발해 대산농촌문화대상, 농업기술명인, 농촌여성대상 등을 휩쓴 명사다. 부모님이 세운 우리원은 11만m²의 유기농 쌀과 1만6500m²의 매실을 재배하고, ‘강대인 생명의 쌀’과 125g 한 끼 단위의 ‘키스미’ 같은 유기농 쌀 제품, 어머니가 빚은 다양한 발효식품과 음료를 출시하고 있다.

혹시 부모님이 너무 유명해서 부담스럽진 않나요. ‘농업계 금수저’라고….

부모님 덕에 농촌에서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맞아요. 하지만 저는 금수저가 아니라 ‘금호미’라고 대답해요. 농사는 직접 일해야 물려받은 것을 유지할 수 있거든요. 남들보다 더 많이 호미를 들고 일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소득을 이어갈 수 없어요. 그런 점에서 농업이 공평한 것 같아요.

청년농부단체 조직은 언제부터 구상했나요.

저는 청개구리처럼 튀는 성격이지만 내성적이었어요. 읍내에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3년 전쯤  4H(Head·Heart·Health·Hands) 지역활동에서 옛 친구를 만나 농사 이야기를 참 많이 나누었어요. 친구들을 만나보니 관행농사를 지으면서도 더 땀 흘리고 열심히 기술 개발하는 인재가 많았어요. 그때부터 여러 모임에 나가게 됐고, 지난해 지오쿱이란 전남 지역 청년들의 유통협동조합도 설립했어요. 창업을 해보니 용감해져 청연 설립까지 추진하게 됐죠.

유기농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유기농이 전적으로 맞고 다른 것은 틀리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쩌면 제가 한쪽만 보고 자란 셈인지 모르죠. 궁극적으로 친환경이 맞다 하더라도 저보다 더 땀 흘려 관행농사를 짓는 친구들의 가치를 폄하할 수 없잖아요. 서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열린 생각으로 존중하면, 농업이 더 유연한 모습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우리 농업이 풀어야 할 큰 과제는 뭔가요.

에고,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는 10년차 초보 농부라고 자신을 소개해요. 회사 들어가 3년이면 대리가 되는데, 농업은 10년이 돼도 배워야 하잖아요. 저희 어머니같이 30~40년 농사지으신 분들도 계속 새로운 문제에 부닥치거든요. 누구도 농업의 길이 이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요. 그런 점에서 농업은 지루하지 않고 청년들의 도전의식에 부합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실패해도 결정적으로 쓰러지는 게 아니거든요.

상주(경북)·보성(전남)= 글·사진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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