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잠수부 '머구리'의 삶, 우리들 아버지 이야기"

이태훈 기자 2017. 9. 20.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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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다큐영화제 개막작 선정 '올드 마린보이' 진모영 감독

"파란 바다 위, 잠수복을 입은 중년의 '머구리' 남자가 투구를 벗고 배에 팔을 걸친 채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진이었어요. 제목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바다에 두 다리를 내줘야 했다'. 퍼뜩 생각했죠. 이거다. 이게 '아버지'와 '인생'에 대한 은유다."

서울 마포의 작업실에서 만난 진모영 감독은“DMZ다큐영화제에서 받은 지원금을 종잣돈으로‘님아’를 만들어 영화제 관객상을 받았고, 극장 개봉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올해‘올드 마린보이’가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더 영광스럽다”고 했다. 뒤 사진은 이번 영화 주인공 박명호씨 가족. /조인원 기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이하 '님아')의 진모영(47) 감독은 "그게 2013년 11월 2일이었다"고 했다. 진 감독은 강원도 산골 노부부의 사랑을 다룬 '님아'로 전국 480만 관객을 모으며 한국 다큐 영화 흥행사를 새로 썼다. 한창 '님아'를 촬영하던 때, 우연히 잡지를 펼쳐든 진 감독은 "'님아'의 노부부를 만났을 때처럼" 동해 잠수부 '머구리'('잠수'를 뜻하는 일본어 '모구리'에서 비롯된 말) 이야기에 꽂혔다. 머구리는 60㎏짜리 잠수복을 입고 수심 30m 해저에서 산소 공급 줄 한 가닥에 의지해 하루 8~9시간 해산물을 잡아 올리는 잠수부. 기사는 잠수병으로 다리를 못 쓰게 된 머구리 남자 이야기였다.

"흔히 '간도 쓸개도 다 내준다'고들 하잖아요. 그분은 가족을 부양하다 실제로 두 다리를 잃은 거예요." 그 뒤 딱 4년, 오는 11월 2일 진 감독은 새 다큐 '올드 마린보이'를 개봉한다. 강원도 고성 대진항 앞바다 저도 어장에서 머구리로 일하는 탈북자 가장(家長) 이야기다.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21일 영화제 관객들과 먼저 만난다.

이번 다큐 주인공 박명호(52)씨는 2005년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북의 황해도 옹진에서 남의 인천 옹진으로 왔다. 북에서는 집에서도, 군대에서도 남한 TV를 봤다. 박씨는 17년 군 생활 동안 머구리 일을 배웠고, 지금도 그 일을 계속 한다.

매년 4월 어장이 처음 열리면 어선이 300척쯤 몰렸다. 그중 머구리 배는 일곱 척. 촬영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수중 촬영감독이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30분씩 하루 세 번뿐. 해풍이 살을 에고, 날 선 햇빛이 눈을 찔렀다. 제작비는 계속 치솟고, 진 감독은 눈이 상해 백내장에 걸렸다. 그렇게 얻어낸 결과물은 놀랍다. 푸른 동해 바닷속은 맑고 아름답다. 물속에서 머구리 박씨는 액션 배우처럼 날렵하다.

박씨는 "그래도 내가 아버지고 남편인데…"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생사의 경계를 넘어 탈북했더니, 남북 경계의 동해 최북단 어장에서, 바닷속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를 살아가는 운명이 얄궂다. 진 감독은 "가족이 탈북할 때 타고온 조각배는 10년도 전에 남에 도착했는데, 정작 이 가족은 아직 파도에 출렁이는 배 위에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감독은 "이번 영화 제목은 영어로 '올드 마린보이'지만 한글로는 '아버지의 바다', 한자로는 '고해(苦海)'로 하고 싶었다"고 했다.

'님아'에 대해 한 번 더 물었다. "할머니는 요즘 읍내 아파트에서 사세요. 안방에 딸린 욕실에 온수 펑펑 나온다고 좋아하시고. 할머니는 영화 덕이라고 하시지만, 실은 할머니가 한국 다큐판도 바꾸고 제 인생도 바꾸신 거죠." 진 감독은 "흥행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다큐를 찍을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면서 "때로는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처럼, 또 때로는 운명을 점치는 역술가처럼 진실의 한 얼굴을 영화에 계속 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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