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불씨' 담긴 종이 한 장, 종교와 세상을 바꿨다

비텐베르크·에르푸르트(독일) | 조운찬 후마니타스연구소장 입력 2017. 9. 19.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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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 ‘김덕영 교수와 함께 하는 독일사상기행’

마르틴 루터가 35년간 생활했던 ‘종교개혁의 산실’ 루터하우스. 수도원, 루터의 사택, 비텐베르크대학 건물 등으로 사용돼 오다 19세기 후반부터 루터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연일 관람객들로 북적인다. 김규수씨 제공

지난 8일 오전 9시40분, 독일사상 기행단을 태운 버스가 비텐베르크시의 루터하우스 주차장에 섰다. 눈에 들어온 것은 루터하우스 정문에 내건 종교개혁 500주년 홍보 깃발이었다. 루터의 얼굴 실루엣에 ‘루터!(LUTHER!)’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루터의 도시’임이 실감 났다. 정문을 지나 들어간 루터하우스의 안마당은 잔치라도 벌어진 듯 관람객으로 가득했다. 특히 루터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의 기념상 주위에는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문을 나서며 손님을 환대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카타리나 기념상은 종교개혁 당시 루터의 제자 등 50명이 넘는 식객들의 숙식을 해결해주었던 그녀를 잘 표현한 듯했다.

루터하우스는 루터가 35년간 생활했던 종교개혁의 구심점이다. 1508년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도착했을 때는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의 건물이었다. 그는 처음 수도사로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1525년 가정을 꾸린 뒤로는 살림집으로 사용했다. 신학 교수였던 루터는 이곳에서 연구하고 저술하며, 찾아온 학생들을 가르쳤다. 루터하우스는 루터 사후 비텐베르크 대학 건물로 사용되다 1883년 이후 루터박물관으로 개조해 종교개혁의 역사를 증언하는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루터하우스로 들어가니 안내데스크에 10여개의 언어로 된 관람 안내 책자가 죽 놓여있다. 한국어 책자도 있다. 안내 책자에 따르면 루터하우스는 1000여점의 원본 전시물을 가지고 있는 세계 최대의 박물관이다. 그에 걸맞게 루터의 일상과 학문, 그리고 중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비텐베르크 시청 광장의 루터기념상 앞에서 김덕영 카셀대 교수가 종교개혁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기행단은 동행한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의 안내로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3층으로 구성된 전시실은 당시의 사회 및 시대상, 루터의 초상과 저작, 루터 번역 성서를 비롯한 종교개혁 관련 유물이 풍성하게 진열돼 있었다. 그 가운데 1층에 전시된 ‘면죄부 헌금함’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당시 성직자들이 면죄부를 팔며 받은 돈을 보관하던 금고다. 헌금함에는 자물쇠가 3개나 달려 있었다. 특정인이 혼자서 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장치라고 한다. 헌금함 옆 벽에 독일어로 쓰인 ‘95개 반박문(테제)’이 걸려 있다. 김 교수가 5번째 조항을 해석해 주었다. “교황은 자신의 직권이나 교회법에 근거하여 부과한 형벌 이외에는 어떠한 형벌도 사면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사면할 수도 없다.” 루터는 ‘95개 반박문’을 담은 대자보를 붙이면서 타락한 가톨릭교회에 개혁의 도전장을 던졌다. 철제 금고를 동원한 교회의 타락상을 한 장의 종이로 고발한 것이다. 김덕영 교수는 “루터가 반박문을 내걸 때만 하더라고 교회를 개혁해야겠다는 거창한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토론해 보자는 소박한 뜻에서 시작한 게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루터의 행위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그를 파문했다. 김 교수는 “반박문 5조에서 보이듯, 로마 교황은 면죄부 비판보다는 교황권에 대한 도전을 더 문제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루터하우스 바로 옆에서는 ‘루터! 95개의 보물, 95명의 인물전’이 열리고 있었다. 루터기념재단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지난 5월부터 열고 있는 기획특별전이다. 수도복, 설교 단상 등 루터의 손때가 묻은 유물과 함께 십계명 화판, 당시 제후의 초상화 등 원본 그림들이 관람객을 끌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고성을 찾은 ‘경향신문 독일사상기행’ 참가자들.

루터하우스 정문에서 ‘95개 반박문’이 내걸린 비텐베르크 궁정교회로 통하는 ‘콜레기엔 슈트라세’는 종교개혁 순례길이다. 길을 조금 지나 마주한 건 3층 건물의 ‘멜란히톤하우스’였다. 루터의 친구이자 개혁 동지였던 필리프 멜란히톤이 살던 집이다. 외벽에는 ‘멜란히톤이 살고, 가르치고, 숨을 거둔 곳이다’라고 쓰인 표지판이 걸려 있다. 루터의 개혁 의지에 큰 감명을 받아 1518년 비텐베르크로 온 멜란히톤은 건물이 세워진 1536년부터 1560년 죽을 때까지 이 집에서 루터의 개혁정신을 교육하고 확산시켰다.

멜란히톤하우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루터가 설교했던 시립교회(마리아교회)가 있다. 루터는 이 교회에서 독일어로 처음 예배를 드리고 직접 작사·작곡한 찬송가를 불렀다. 종교개혁을 실험한 최초의 개신교회인 셈이다. 교회 설교단 뒤에는 종교개혁 정신을 잘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루카치 크라나흐 2세의 유화 ‘주님의 포도밭’이 걸려 있다.

비텐베르크 궁정교회는 종교개혁의 발상지이다. 1517년 10월31일, 루터는 이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며 개혁의 횃불을 치켜들었다. 당시 정문은 반박문을 못으로 박아 내걸 수 있는 나무문이었다. 그러나 18세기 7년 전쟁으로 문이 불에 타는 바람에 청동문으로 교체되었다. 지금의 문에는 95개 조항이 주조돼 있다. 교회 안에는 루터와 그의 동지 멜란히톤을 안장한 묘지가 있다.

루터하우스에 전시된 면죄부(아래 사진)와 ‘95개조 반박문’.

비텐베르크는 인구 5만명의 작은 도시다. 500년 전 루터 당시에는 2000여명에 불과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개혁의 불씨가 종교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었다. 그런 점에서 비텐베르크는 개신교인의 성지이면서 유럽인의 성지다. 비텐베르크 앞에는 항상 ‘루터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루터의 도시는 곳곳이 축제의 마당이다. 루터와 멜란히톤의 기념상이 나란히 서 있는 비텐베르크 시청 광장은 주말이면 기념 콘서트와 전시회가 열린다. 궁정교회는 500주년을 맞아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했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를 인쇄해 배포했던 루카스 크라나흐 인쇄소도 복원돼 순례자들에게 루터의 상징인 장미꽃 인장을 찍어주고 있다. 비텐베르크시 외곽에는 500주년을 기념하는 나무 500그루를 심어 가꾸고 있다.

앞서 기행 참가자들은 루터가 대학을 다니고 수도사로 활동했던 에르푸르트시를 찾았다. 루터 당시 에르푸르트는 30개가 넘는 교구 성당과 수도원이 들어서 있어 ‘독일의 로마’로 불렸다. 20대 초반의 루터는 이곳에서 대학에 다니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다. 에르푸르트 도심에는 루터가 수도사로 첫발을 디딘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 사제 서품을 받은 대성당, 설교를 했던 성 미카엘 교회 등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기행단은 에르푸르트 대학의 한 모퉁이에 자리한 ‘게오르겐 생활관’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1464년 건립된 이 생활관은 루터가 대학에 들어와 수도원에 입소하기까지 5년간 거주했던 기숙사이다. 지금은 대학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담쟁이 넝쿨로 덮인 담장의 기념 동판이 없었다면 루터가 생활했다는 사실조차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판에는 ‘마르틴 루터가 학생으로 1501년부터 1505년 7월17일까지 살았다’고 적혀 있었다. 루터에게 에르푸르트는 종교개혁의 씨앗을 뿌린, 사상의 원천과 같은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1500년간 유럽을 지배했던 기독교는 신교와 구교로 양분됐다. 루터의 영향은 종교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사상과 개혁은 중세의 유럽 사회를 흔들었다. 루터는 종교의 패러다임을 바꾸었으며 중세를 종결시키고 근대를 열어젖혔다. 마르틴 루터는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었을까. 김덕영 교수는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요인으로 루터의 천재성과 영웅성, 그리고 시대의 요청을 꼽았다. 개혁가 루터는 127권이라는 거질의 저작을 남긴 사상가였다. 작은 마을의 성직자였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앞에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굽히지 않은 영웅이었다. 여기에 세속화된 성직자, 타락한 교황청, 그리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개혁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김 교수는 “종교개혁의 원인을 면죄부 판매로 국한시키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며 “종교개혁은 중세와 교회의 총체적 위기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가 주관한 ‘김덕영 교수와 함께하는 독일사상기행’은 루터뿐 아니라 세계 지성사를 수놓은 독일 사상가들의 자취를 찾는 인문기행이었다. 20명의 기행 참가자들은 7박9일의 일정으로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뉘른베르크, 에르푸르트, 바이마르, 라이프치히, 비텐베르크, 베를린, 드레스덴과 체코 프라하를 차례로 돌았다.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흔적을 찾아 고성과 철학자의 길을 거닐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포이에르바흐의 철학을 공부하고, 바이마르에서는 문호 괴테의 집을 관람하였다. 프라하에서는 종교개혁의 선구자 얀 후스와 작가 카프카의 무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독일, 아니 독일어권 어디를 가든 루터의 흔적은 넓고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방문하는 곳마다 눈에 띄는 것은 ‘루터의 길’이었고, ‘루터기념상’이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길에 새 이름을 붙이고 동상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오래전부터 독일인들의 심성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터가 역사에 드리운 족적은 독일과 유럽이라는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독일사상기행을 이끈 김덕영 교수는 “종교개혁은 단일 사건으로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며 “루터는 중세를 극복하기 위해 고대의 원천으로 돌아갔는데 그 과정에서 근대를 추동하였다”고 말했다.

<비텐베르크·에르푸르트(독일) | 조운찬 후마니타스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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