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보니]사라진 맥주 장인, 보리스씨를 찾았다

장회정 기자 2017. 9. 19.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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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 주 전, 산 프루토스의 양조장에서 촬영했다며 메조네스씨가 보내온 사진.

독설가로 잘 알려진 스타 셰프 고든 램지가 최근 한국의 한 광고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그가 “맛있다”고 극찬한 제품은 바로 맥주였다. 음식맛이 성에 차지 않으면 곧바로 욕설을 내뱉거나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악명 높은 요리사가 한국 맥주를 극찬하자, 온라인상에서는 또 한 번 한국 맥주에 대한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그래도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이 ‘한국 맥주가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라는 칼럼을 썼던 2012년에 비하면 ‘맥주 여건’은 꽤 좋아졌다. 그저 톡 쏘고, 목 넘김이 좋고, 깔끔한 뒷맛을 남기는 라거 맥주 일색이던 시장이 보다 다양해진 데에는 물론 ‘1만원에 수입맥주 4캔’의 순기능도 있지만, 크래프트 맥주 붐을 빼놓을 수 없다.

2014년 4월 주세법 개정으로 소규모 맥주 제조업체의 외부 유통이 허용되면서 본격적인 국내 크래프트 맥주(일명 하우스 맥주·수제 맥주) 시장이 활성화됐다. 2015년 엠브레인의 설문조사를 보면 수제 맥주를 선호하는 이유로 고급스러움, 좋은 원료, 색다른 맛, 독특함 때문이라는 의견이 높게 나타났다. 크래프트 맥주는 다양한 맛뿐만 아니라 제조자의 철학, 개성 있는 제품 디자인, 흔하지 않은 특별함 등으로 ‘요즘’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요즘은 탭(생맥주 꼭지)을 갖춘 크래프트 맥주 전문점을 찾지 않아도 된다. 소규모 양조장에서 제조한 병맥주를 일반 마트에서도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래프트 맥주가 생소하던 2007년부터 직접 빚은 맥주를 팔았던 푸른 눈의 장인이 있다. ‘맥덕(맥주 덕후)’이라면 제주공항에 내리자마자 제주 시내에 위치한 그의 맥줏집으로 직행하거나, 공항에 가기 전 그 맥주를 페트병에 담아들고 비행기를 타야 직성이 풀렸다. ‘망고, 레몬향이 나는 맑은 노란색의 맥주’라는 설명이 붙은 ‘J-보리스 맥주’에서는 진짜 향긋한 과일향이 났다. 페일에일, 필스너, 흑맥주에서는 신기하게도 초콜릿과 커피향이 풍겼다. 풍선껌 맛이 나는 착향 칵테일류 맥주와는 비교가 안되는 ‘자연’의 맛이었다. ‘국제맥주대회 메달 획득’이라는 메뉴판의 수식이 허튼 것이 아니라는 걸 맥주 한 모금으로 바로 인정하게 됐다. 그동안 ‘외국 사람들’은 이렇게 맛있는 맥주를 마셨다는 것인가. 배신감도 들었다.

미식 블로그뿐만 아니라 맥주 관련 온라인동호회에서도 ‘보리스 브루어리’ 방문 후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갈 때마다 새로운 맥주를 선보였다거나, 쑥스럼 많은 보리스씨와 맥주 얘기를 나눴다는 후기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제주 보리로 맥주를 만드는 맥주 장인 보리스씨’의 소식이 뚝 끊겼다. 보리스 브루어리가 갑자기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스페인으로 돌아간 맥주 장인

사진: 메조네스씨의 블로그

이메일로 연락이 닿은 보리스 데 메조네스(55, Boris de Mesones)씨는 “많은 분들이 여전히 제 맥주를 기억한다는 것을 알게 돼 매우 기쁘다”라고 안부 인사를 전했다.

메조네스씨는 “2015년 2월 가게 재계약이 원활하지 않아 새 건물을 찾던 중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스페인으로 돌아가야했다”고 했다. 고향에서도 그는 제주에서 만들던 방식으로 그만의 맥주를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한국에서 그렇게하듯 저도 부모님을 모시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분들이 저를 보살펴주셨던 것처럼요.

-요즘 한국에서 크래프트 맥주가 대중화됐습니다. 스페인에서도 인기인가요?

크래프트 맥주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죠. 크래프트 맥주의 인기에는 대형맥주업체에서 전문맥주 시장 부문을 등한시 한 이유도 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400여개의 크래프트 맥주 브루어리(양조장)가 있고 연간 30~40%의 매출 증가세를 보이고 있어요.

-세계 맥주 트렌드도 그런가요?

크래프트 맥주는 전 세계에 걸쳐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는 방식을 바꾸고 있어요. 이런 추세는 수년 간 계속될 겁니다. 새로운 세대는 한 가지 형태 그 이상의 맥주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한국에서는 제주 보리로 맥주를 만들었잖아요. 메조네스씨가 스페인에서 만드는 맥주는 어떤 특징이 있나요?

네, 제주도에서는 제주 보리로 맥주를 만들었죠. 스페인에서도 제주에서와 같은 레시피로 이 지역 보리를 이용한 맥주를 만들고 있어요. 그렇게 바이킹아도르(www.vikingathor.com)와 페일에일인 테라피아(Terapia)를 만들었고, 최근엔 발루트 브루어리(Ballut Brewery)와 협업했어요.

유럽 전역에서 팔리고 있는 보리는 제주 보리와 다르게 다소 자극적이고 폴리페놀이 풍부해요. 그 맥주로 유러피언 챔피언십(EBS)에서 두 개의 은메달,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비어컵대회에서 한 개의 은메달을 받았어요. 테라피아로는 2015년 아시아비어컵대회 금메달을 받았어요.

제조법을 바꾸고 색다른 보리로 여러 차례 제조를 시도한 끝에 더 부드러운 맛을 얻을 수 있었어요. 그 결과 바이킹아도르 맥주로 올해 바르셀로나 비어챌린지대회에서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주로 심사위원 자격으로 대회에 참가하고 있어요. 마지막 참가한 대회가 호주 세계맥주대회(AIBA)였네요.

사진: 메조네스씨의 블로그.

-최근에 한국에 크래프트 맥줏집이 많이 생긴 거 알고 계세요? 왜 크래프트 맥주를 좋아할까요?

소규모 양조장 관련법이 바뀌면서 전국에 걸쳐 많은 양조장들이 생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크래프트 맥주는 풍부한 맛과 향, 그리고 신선함을 맛볼 수 있다는 게 주효한 거 같아요. 또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은 (대기업보다는) 빠른 기간 내 젊은층이 좋아할만한 다양한 스타일과 새로운 향과 맛의 맥주를 만들어낼 수 있거든요.

-한국 맥주 중에는 어떤 맥주를 좋아했나요?

제가 어떤 맥주를 가장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국 맥주는 맛이 풍부하고 균형이 잘 잡혀있고 마시기 편한 맥주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합니다.

-한국 맥주는 맛이 없다던가, 밍밍하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대량 생산하는 맥주의 경우 숙성이 덜 된 맛이 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전통적으로 소비자들이 좋아해온 방식이라 그럴 겁니다. 소주를 타서 폭탄주를 만들거나 그냥 편하게 마시기에 이상적이었을 테니까요. 다만 제가 수년 전 발견한 유일한 문제점은 맥주의 신선도 관리가 일관되지 못한 점이었어요. 때로는 아주 훌륭한 곳도 있었지만, 아닌 곳도 많았거든요.

-한국의 맥주 문화는 어떻게 보세요?

맥주 양조자 입장에서 한국의 맥주 문화는 제게 완벽했어요. 전통적인 유럽 스타일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었거든요. 덕분에 새로운 스타일을 익히고 개발하기에 좋은 환경이었죠. 새 맥주를 내놓으면 항상 고객들로부터 진심어린 피드백을 받았는데, 그 또한 저의 맥주 개발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유명 요리블로거가 보리스 맥주를 최고의 맥주라고 꼽기도 했어요.

영광입니다. 그동안 전통적인 제조 방식에만 의존하지 않고 최대한 현지 보리를 활용해 나만의 스타일로 제조해왔어요. 보편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양조자 입장에서는 편하고 신선하게 마실 수 있는 맥주를 만들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위해선 지난 수십 년간 독일인들이 써내려온 전통의 양조 규칙을 깨야했습니다.

-맥주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조언을 주신다면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사람마다 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종 맥주대회에서는 8명 이상의 심사위원을 두거든요.

저는 항상 "맥주가 얼마나 맛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마시기 쉬워야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주 독한 맥주를 한 잔 마셨음에도 미각에 거슬리지 않고 민감한 맛이 입안에 남지 않았다면, 잘 만든 맥주를 마시고 계신 겁니다. 가능한 한 신선한 맥주를 마셔보세요. 아무래도 병맥주보다는 생맥주가 낫겠죠.

생맥주의 경우 맥주 라인(관) 청소가 제대로 이뤄져야 하고요(바텐더에게 물어보세요!). 가급적이면 그날의 첫 맥주는 마시지 않는 게 좋겠죠. 그건 라인에 머물러 있던 맥주니까요.

맥주를 마실 땐, 맥아와 홉의 신선한 향을 맡고 한 모금을 마신 뒤 맥주를 입천장을 따라 펼치듯 삼키고 쌉싸름한 뒷맛을 느껴보세요. 몇 초 후 쓴맛이 사라지고 여타의 감각 없이 입안이 깨끗해지는 느낌이라면, 여러분은 멋진 맥주를 마신 겁니다.

-한국에서 보리스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2년 전에 한국 내 수입업자를 찾으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견본 맥주의 품질은 매우 좋았지만, 수입업자가 제품 라벨을 좋아하지 않았거든요(바이킹의 해골 모양이라…). 비슷한 라벨을 붙인 새로운 샘플이 곧 한국에 도착할 거예요. 이번에는 성공할 것 같습니다.

■아내의 고향에서 본격적인 ‘맥주 인생’

2011년 유러피안비어스타 맥주대회에서 ‘실버’로 입상했다. 사진: 메조네스씨 볼로그.

스페인 출신인 메조네스씨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영국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영국에서 은행원 생활을 하던 그는 어느 날 맥주 제조 키트로 집에서 만들어본 ‘수제 맥주’의 맛에 반해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맥주 양조법을 배우던 독일의 베를린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만나 2003년 결혼했다. 이후 아내의 고향인 제주도에 정착해 처남과 함께 ‘모던 타임’이라는 맥줏집을 운영했고, 2007년 보리스 브루어리를 열었다. 제주대에서 양조 관련 강의를 하고, 제주개발공사와 함께 제주 백호보리로 만드는 지역 맥주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제주도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흥미진진했어요. 인생에 대해서도, 맥주에 대해서도 많은 걸 배웠죠. 다른 문화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당연히 주어지지 않는 그 무언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지난 10년 간 한국에서 낯선 재료와 새로운 방법으로 양조장을 운영하기란 참 어렵고 고됐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제 아내와 아들은 여전히 제주도에서 살고 있어요. 아들은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생후 40일 만에 한국으로 와서 한국 학교를 다녔죠. 아내와 아들은 한국어로, 저와 아들은 스페인어로, 또 아내와 저는 독일어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제 아들은 영어도 잘해요. 진정한 다국어 능통자네요.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은 없나요?

각종 제조 장비와 1500리터의 양조장, 8개의 발효용기가 제주도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다시 오픈해서 맥주를 만들 생각이었죠. 그런데 12개의 타 맥주 양조장 오픈 작업을 하면서 제가 뭘 잘할 수 있고, 하고 싶은지를 알게 됐어요. 과거에는 제주 밖에서는 맥주를 팔지 않았는데, 이제는 다른 곳에서도 팔 수 있게 되었잖아요. 이전처럼 모든 걸 저 혼자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판매와 유통을 담당할 투자자와 사업 파트너를 찾고 있어요. 몇몇 제안이 오가긴 했는데 제주 생활을 재개하기엔 충분치 않았어요. 곧 좋은 결과가 있길 기대합니다.

-맥주 양조자로서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궁극적인 목표는 양조장을 소유하고 모두가 사랑하는 맥주를 만드는 거겠죠. 하지만 경쟁적인 환경과 경제적인 제약으로 인해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대형맥주제조사에게 유리한 여건이니까요.

<장회정 기자 long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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