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탐색] "이럴 거면 왜 뽑았지?" 장애인 고용부담 피하려 채용은 했는데..

안승진 2017. 9. 1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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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자료사진.


“우릴 왜 뽑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지난 7월 지체장애 3급 이모(41)씨는 한 관광회사 ‘사무관리직’으로 취업에 성공했다. 

지방자치단체 장애인직업교육 시설에서 관련 교육까지 이수한 이씨는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첫 출근일 사무실에 앉은 이씨는 할 일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맡은 일이 없었다. 

주변 동료와 상사는 “솔직히 맡길 일이 없다”며 이씨에 대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던 그는 얼마 후 다른 부서로 배치받았다. 그곳에서는 이씨에게 자동차 정비 시 전선을 뽑거나 부품을 나르는 일을 맡겼다. ‘사무관리’로 채용됐지만 직무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씨는 “이 회사는 장애인을 뽑을 준비가 안 돼 있었다”며 “월급은 받아야 하니 뭐라고 항의할 수도 없었다”고 푸념했다.

뇌병변 4급 장애인 유모(31)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사진편집 기술을 배워 포토샵 디자이너로 취업에 성공한 유씨는 직장에서 소외됐다. 뇌병변 장애에 따른 손 떨림으로 동료보다 편집 속도는 조금 느렸지만 마감일마다 연장 근무도 마다하지 않고 업무를 충실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주변 동료는 그에게 좀처럼 일을 맡기지 않았다.

결국 7개월 후 회사 사장이 찾아와 위로금 50만원을 쥐여주며 유씨에게 "내일부터 나오지 말아달라"며 해고를 통보했다. 

비장애인 직원과 업무 협조가 되지 않고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동안 뒤처지지 않도록 열심히 일했던 유씨는 허탈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장애인고용촉진법률에 따라 상시 근로자 100명 이상의 사업장은 근로자의 2.9%를 장애인으로 고용해야 한다. 이를 달성하지 못한 사업장은 부담금을 내야 하고, 의무고용의 2.7%를 초과 달성하면 고용 장려금을 받게 된다.

정부가 이처럼 부담금을 통해 장애인 채용을 압박하자 기업은 업무 효율을 제대로 따지지도 않고 면피성으로 고용하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 낀 장애인들은 취업했더라도 직장 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할 일이 없어 잡일을 도맡는 것은 예사고 아예 할 일이 없는 사례도 다반사다.

동료의 편견 어린 시선도 장애인 취업자를 힘들하고 있었다.
 
지체장애 5급인 최모(33)씨는 전자부품회사에 다니며 비장애인 동료에게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그들은 최씨를 비롯한 장애인 동료와 점심식사를 갖거나 대화조차 꺼렸으며 심지어 비하하는 언행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장애인 직원 3명은 함께 회사를 나왔다.

◆정부, 취업률 늘리기에만 급급···고용의 질은 글쎄

상황이 이렇다 보니 2014년 기준 장애인 실업률은 7.8%로 전체인구 실업률(3.7%)의 두배에 달한다. 20대 여성 장애인의 실업률은 무려 35.4%다. 장애인 경제활동참가율이 38.5%에 불과한 데다 상당수 장애인이 퇴사를 당하거나 어쩔 수 없이 선택하고 있어 장애인 실업자는 늘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의 조호근 상담센터장은 “장애인이 고용된 뒤 부당한 처우를 받는 일은 다반사”라며 “장애인을 어떤 부서에 배치할 건지 계획을 잡고 뽑아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이 부담금을 피하려고 채용하는 일이 잦다 보니 장애인이 일하기 힘든 부서에서 힘들어하다가 스스로 나오는 이도 많다”고 설명했다.

부당한 업무를 맡거나 차별을 받고 있어도 묵묵히 입을 닫는 장애인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최저임금조차 보장하지 않는 직장에서 취업조차 힘든 장애인은 그저 '고맙다'며 머리를 조아리며 다녀야 하는 신세라는 불만도 커지고 있다.

한 중증장애인은 “우리에게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라며 “원래 약속한 근무조건과 달라도 기업이나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 싫은 소리를 할 수 없다"고 털어놨다. "그러다 정말 갈 곳이 없어질까 두렵기 때문이다”라고 부연했다.

한국장애인개발원 관계자는 “직업재활센터나 복지단체 등의 몇몇 장애인 고용업체는 관련 복지가 갖춰져 있지만 월급이 적고, 일반 사업장은 ‘편의’보다 ‘고용’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복지가 취약하다”며 “생계가 달려있는 장애인들은 복지를 포기하더라도 고용을 위해 사업장에 남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더 큰 문제는 장애인 일반사업장의 근로실태를 점검, 개선할 수 있는 제도적 장비가 미흡하다는 점이다. 

장애인고용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장애인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장 1만9987곳에 달한다. 
 
공단 관계자는 “장애인 표준사업장으로 등록된 사업장에 대해서는 분기마다 1회 이상 장애인 시설과 근로자 인권침해 여부를 점검하지만 일반 사업장은 지원정책을 신청할 때마다 비정기적으로 점검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일반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장애인 근로 실태점검에서는 ‘업무의 질’이나 ‘만족도’ 같은 정성적인 요소에 대한 평가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저임금 준수’와 ‘장애인 근속 여부’ 정도를 파악하는 데 그치는 실정이다.

◆직장 내 장애인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장애인 표준사업장 연합회 관계자는 기업의 발전을 위해 내부에서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인만큼 경쟁력을 갖추고 성장하는 목적으로 장애인 근로자를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당 장애인 고용률이 4.7%(2014년 기준)에 달하는 독일에서는 '사회법전' 9권에 따라 장애인을 고용한 기업은 중증장애인 대표를 뽑아 인사와 일자리, 노동환경, 노동시간 등을 고용주와 합의하도록 하고 있다. 장애와 비장애 간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협의해 기업의 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 대표가 있기에 고용주의 일방적인 무단 해고도 쉽지 않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 기업 대부분은 장애인의 의견을 따로 수렴할 수 있는 채널이 마련돼있지 않아 불만이 있어도 쉽사리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대구대 직업재활학과 조성재 교수는 “장애인 고용이 부담제도를 통해 강제로 이뤄져도 이후 유지가 되지 않고 있다”며 “새 정부에서 강조하는 것이 ‘좋은 일자리’ 즉 고용 안정성인데, 장애인에 관해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제도나 기관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나라에선 현재 노동부와 보건복지부가 장애인 고용에 관한 비슷한 업무를 담당해 혼란이 많은데, 미국은 실무 서비스와 장애인 관련 연구 및 훈련기관으로 명확히 나눠놨다”며 “우리도 장애인 지원 부처를 통합해 전달체계를 효율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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