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기자의 지금, 여기]"무릎 꿇은 장애아 어머니, 21세기 대한민국의 초라한 자화상"

입력 2017. 9. 18. 03:01 수정 2017. 9. 18. 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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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복지재단 이사장 홍정길

[동아일보]

13일 서울 강남구 일원로 밀알학교에서 만난 홍정길 밀알복지재단 이사장은 교내 콘서트홀에 설치된 중국 도예가 주러겅의 세라믹 작품에 대해 “노래 부르는 사람들의 입 모양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며 “우리 학교 아이들처럼 맑고 순수한 모습”이라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전승훈 기자
《 “무릎 꿇은 장애아 어머니들을 보고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20년 전 우리가 당한 고통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똑같은 현실이라니 너무나 참담합니다.”

13일 서울 강남구 일원로 밀알학교에서 만난 홍정길 밀알복지재단 이사장(75)에게 최근 서울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장애아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은 영상을 봤느냐고 했더니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던 그는 2, 3분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날 특수학교 설립 토론회가 열리는 줄 알았다면 현장에 쫓아갔을 겁니다. 그런데 몰랐어요…. 미안합니다.” 올해로 개교 20년을 맞은 밀알학교는 발달장애 아동을 위한 유치부, 초·중·고등부, 전공과정에 현재 206명이 다니고 있는 특수학교다. 그러나 1997년 설립 당시 아파트 값 하락을 우려한 주민들의 반대 시위와 소송으로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개신교계의 원로목사(남서울은혜교회)인 홍 이사장에게서 당시 이야기를 들었다. 》

“내 아이를 먼저 데려가 달라” ―특수학교를 짓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1990년대 초 교회의 한 신자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밑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아, 목사님,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해요. 예배가 끝나고 집을 둘러보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식을 지하에 가둬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유전자(DNA)에 문제가 있다고 알려지면 다른 자녀들까지 혼사길 망친다고 장애아를 밖으로 데려나가지 않았어요.”

홍 목사는 이후 “똑같은 영혼인데 우리와 다르게 보인다고 해서 어떻게 가둬서 키우는가. 하나님 앞에 범죄”라며 장애아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도록 했다.

“어느 날 한 장애인 엄마가 기도회에서 울면서 ‘제가 죽기 1년 전에 제 아이를 제발 먼저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세상에 부모가 자식을 먼저 죽여 달라고 하는 기도는 처음 들었어요. 1975년부터 몸담았던 서울 반포 남서울교회 담임목사직을 포기하고, 장애인 특수학교를 짓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1992년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인근 1만500여 m² 규모의 초등학교 터를 매입했다. 그는 당시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와 밀알복지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던 평생지기 손봉호 박사에게 특수학교 운영을 맡겼다.

그러나 특수학교를 짓는다는 소식에 주변 아파트 벽에 반대 플래카드가 빼곡히 들어차기 시작했다. 공사장에 굴착기나 기중기 같은 건설장비가 들어오면 바로 주민 수백 명이 몰려와 몸으로 막았다.

“주민들과 대화하며 별 수모를 다 겪었습니다. 발길로 걷어차이고, 멱살을 잡히고…. 당시 손 박사가 ‘장애인은 우리가 사랑하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고 설득했더니 주민들이 ‘당신 집안이나 대대로 장애인이 많이 나오길 바란다’라고 퍼붓더군요.”

당시 특수학교 건립 허가는 구의 권한이었다. 강남구청장은 홍 목사에게 “장애인 학교가 들어오면 아파트 값이 떨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며 “집값 하락분을 목사님이 보상해 준다는 각서를 써주면 건립을 허가해 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찌나 어이가 없고 화가 나던지. 제가 대놓고 말했어요. ‘대한민국 지자체 1번지로 꼽히는 강남구청장이 이따위 소리를 하는 대한민국은 참 불행한 나라’라고 말이죠. 그런데 돌이켜보면 제가 이런 역제안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집값 하락분은 제가 보상해줄 테니, 만일 집값이 오를 경우엔 상승분의 10%만 나를 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랬으면 제가 ‘떼부자’가 됐을 거예요.”

1996년 밀알학교 공사 당시 주민 반대로 어려움을 겪던 모습. 밀알복지재단 제공

“특수학교 개교에도 집값 상승률 최고”

밀알학교는 1994년 법이 개정돼 허가권이 구에서 서울시교육청으로 바뀌어 학교 설립 허가가 났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대는 계속됐다. 주민들은 105억 원에 이르는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했다.

“한겨울에 중년의 여성들이 밍크코트를 입고 와서 학교를 점령했어요. 세상에 밍크코트 입고 데모하는 사람은 처음 봤죠. 이분들이 공사 차량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밀치고 하다가 밍크코트 단추가 떨어진 것까지 전부 보상 요구 액수에 포함했습니다. 당시 주민대표 소송 대리인이 고승덕 변호사예요. 나중에 그가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나왔을 때 참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법원은 1996년 2월 밀알학교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전국의 장애인 시설은 주민들의 반대로 신규 허가는 물론이고 증개축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밀알학교가 승소하자 그동안 보류됐던 250여 개 장애인 시설 문제가 모두 풀렸다.

“힘들었지만 우리가 고통을 당한 결과 장애인들을 묶고 있던 사슬을 풀어 버렸다고 생각하니까 기뻤어요. 이후엔 그런 문제가 없어졌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도 장애인 부모들이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은 21세기 우리의 초라한 자화상입니다.”

―학교가 들어선 이후 실제로 집값이 떨어졌습니까.

“당시 30평대 아파트가 2억 원대였는데 지금은 11억∼12억 원 합니다. 일원동은 강남 전체 지역 중에서도 집값 상승률이 가장 높았던 곳입니다.”

―당시 주민들이 반대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얘기를 들어보니 주민들이 학교가 아니라 ‘장애인 수용소’를 짓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더군요. 일단 매일 아침부터 장애인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게 싫다는 거예요. 또 발달장애아는 한번 감정이 폭발하면 셀프컨트롤이 안 된다는데, 갑자기 동네로 들어와서 우리 애들에게 해코지하면 어떡하느냐고 억지소리도 늘어놓았습니다.”

―장애아들이 실제로 동네 아이들을 위협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개교 후 그런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이제 주민들도 자폐아들이 위험하다고 했던 말들이 모두 공포감이고 선입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죠. 당시 반대하던 주민 중에 밀알학교 체육관에서 예배를 보는 우리 교회 신자가 된 분들도 많아요.” 밀알학교는 2001년에 카페, 빵집, 미술관, 음악홀 등 주민 편의시설을 갖춘 ‘밀알아트센터’를 개관했다. 특히 중국의 유명 도예가 주러겅(朱樂耕)의 세라믹 작품으로 만든 벽화와 음향판으로 시공된 세라믹팔레스홀은 뛰어난 음향으로 베를린필하모닉 스트링퀸텟,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 등 세계적인 연주자들도 자주 찾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잠재적 장애인”

“대부분의 특수학교엔 장애아, 교사, 학부모만 출입해요. 경기도의 한 특수학교 학부모가 학교 주변에서 사람들과 마주치면 ‘쳇’이나 ‘쯧’ 하는 소리가 들린대요. 그럴 때마다 ‘나는 장애인 자식을 둔 천형받은 인생이구나’ 하는 자괴감에 빠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밀알학교는 그렇지 않아서 부럽대요. 학교에 교회 신자와 일반 주민이 수시로 들락거려 장애인 부모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아서 좋다면서 울어버리더군요.”

―장애아를 일반학교에 보내는 경우도 있는데 특수학교가 필요한 이유는….

“사실은 일반학교에 특수학급을 만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장애학생들이 비장애학생과 섞여서 수업하다 보면 학업을 따라가지 못해 놀림감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정상이라고 생각해서 될 수 있으면 일반학교에 보냅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멸시받을 대로 다 받고, 버려진 다음에 특수학교로 옵니다. 그렇게 대인공포증이 생긴 다음에 특수학교로 오면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졸업식 안 돼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애학교를 기피시설로 생각하는 이유는….

“서양에서 장애인을 보호하는 것은 하나의 공통된 언어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음속에 장애인을 용납하지 않는 뿌리 깊은 관념이 있어요. 아마도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며 조선시대부터 몸이 온전하지 못하면 불효자식이라고 멸시해온 탓도 클 겁니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장애인입니다. 의식 개혁이 국민운동으로 펼쳐지지 않으면 많은 세월이 걸릴 것입니다.”

홍 목사는 “특수학교 졸업식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졸업식’이 된다”며 “장성한 아이가 졸업을 하면 집에서 부모가 24시간 감당해야 하는데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유치부부터 고교까지 13년 교육과정 졸업 후 장애인 직업훈련을 위한 2년 과정의 전공과를 만들었다. 도자기 제작, 구슬 공예도 가르쳤지만 2년간 학교생활이 연장됐을 뿐 사회에서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결국 그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끝에 찾아낸 것이 미국의 ‘굿윌스토어’. 기증받은 물건을 장애인들이 간단히 수선해서 파는 가게다.

“사람들은 장애인들이 만든 물건을 한 번은 사줍니다. 그러나 장애인이 만든 물건이나 액세서리를 실제로 사용하진 않아요.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굿윌스토어’는 장애인이 만든 것이 아니고 기증받은 헌옷이나 물건을 수선해서 파는 가게입니다. 밀알복지재단 내에 4개의 굿윌스토어에서 현재 130여 명의 장애인이 일하면서 최저임금을 받고 있습니다. 130만∼140만 원 정도의 첫 월급을 받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아이들은 물론이고 온 가족이 울더군요.”

홍 목사는 “13년간의 정규교육, 2년간의 전공과정에도 자폐아들은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었는데, 1년간 돈을 벌면서 15년간의 교육 기간보다 더 큰 변화가 생기는 걸 보고 장애인도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장애인 ‘그룹홈’을 만드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죽기 1년 전 자식을 죽여 달라’는 장애인 부모의 기도가 평생 마음에 걸려 있습니다. 부모가 죽어도 장애인들끼리 함께 살 수 있도록 그룹홈을 7개 만들었습니다. 월∼금요일에 장애인 4명과 봉사자 1명이 함께 사는 집입니다. 주말에는 집으로 부모를 만나러 갑니다. 서울 집값이 너무 비싸 정말 어렵긴 하지만, 제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입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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