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안 부수면 사람이 죽고, 문 부수면 소방관이 죽을 지경

장형태 기자 입력 2017. 9. 15. 03:09 수정 2017. 9. 1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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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급상황 출동한 소방대원들, 손해배상 시달려]
- 서울서만 2년여새 54건 발생
국가가 보상하는게 원칙이지만 소액은 대부분 소방관이 합의
출동 중 일어난 교통사고로 소송 휘말리면 홀로 비용부담
소방관 면책법안 1년째 표류 중
변협 392명 무료 법률상담 나서

최근 대한변호사협회에서 무료로 법률 상담을 해줄 변호사를 모집했다. 협회 변호사 392명이 나섰다. 변호사들이 앞다퉈 "보수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 돕겠다"고 나선 이들은 소방관이었다. 김현 협회장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다 억울한 처지에 놓인 소방관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일에 여러 변호사가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투신한다는데… - 지난해 11월 구로소방서 구조대원들이 구로동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하려는 사람을 구조하려고 잠긴 현관문을 강제로 열고 있다. 구조대원들은 구조·구급 과정에서 일어난 기물 파손 때문에 항의를 받거나 민·형사 소송에 시달리기도 한다. /서울소방재난본부

아파트 화재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의 임무는 두 가지다. 화재 진압을 하고, 동시에 불이 난 집의 위층으로 뛰어가 다른 주민을 대피시키는 것이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기척이 없는 집은 출입문을 강제로 열어야 한다. 혹시 안에 사람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문이나 재산을 파손했다는 이유로 소방관이 손해배상 요구에 시달리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서울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지난 2015년부터 지난 6월 말까지 "화재 진압 등으로 발생한 기물 파손을 변상하라"는 요구가 54건 접수됐다. 부서진 문을 변상하라는 민원이 43건으로 대부분이었다. 차량(3건), 에어컨 실외기(2건), 간판·차양막·모기장(각 1건) 파손 청구가 뒤를 이었다.

2015년 12월 강서소방서의 송모(50) 소방위는 불난 다세대 주택으로 진입하려고 옆집 담을 넘다가 발을 헛디뎠다. 몸이 기우뚱하다 반지하 집의 빗물받이가 파손됐다. 다음 날 집주인의 딸이 변상하라며 소방서를 찾았다. 송 소방위는 "불 끄려다 그런 것이니 너그럽게 봐달라"며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 지난해 8월 서울 종로구의 한 아파트 베란다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한 종로소방서 대원들은 "부서진 현관문과 찢어진 소파를 변상하라"는 집주인의 항의를 받고 합의를 끌어내느라 애를 먹었다.

소방 활동 중 소방관이 일으킨 물적 손실은 모두 국가가 보상한다. 소방기본법에 따른 것이다. 구조·구급은 시·도가 가입한 배상책임보험으로 바로 보상할 수 있다. 하지만 화재는 보험 가입이 안 돼 국가 보상 여부부터 법정에서 가려야 한다. 피해액이 10만원 이하면 소방관이 청구인을 찾아가 "상황이 매우 급했으니 이해를 해달라"며 합의를 요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구인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약식 소송에 들어간다. 판결까지 최대 6개월이 걸리기도 한다. 청구인과 합의하는 과정에서 피로감을 호소하는 소방관이 많다.

민·형사 소송에 시달리는 소방관도 적지 않다. 작년 한 해 긴급 업무를 수행하던 소방관이 소송에 휘말린 경우가 7건이다. 대부분 출동 중 교통사고가 문제였다. 소송비를 소방관이 자비로 충당하기도 한다. 2014년 인천에서 구급대가 이송하던 40대 여성이 구급차 뒷문을 열고 뛰어내렸다가 차에 치여 숨졌다. 여성은 만취 상태였다. 유족은 구급대원(37)의 부주의로 여성이 숨졌다며 대원을 상대로 형사소송을 냈다. 대원은 소송에선 이겼지만 모든 비용을 홀로 부담했다.

서울시는 지난 3월 '재난 현장 활동 물적 손실 보상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소방기본법에 분명히 규정되지 않은 보상의 절차와 시기를 못 박았다. 피해를 본 시민이 6개월 안에 소방서에 보상 청구를 하면 30일 안에 보상위원회를 열어 결과를 알려주기로 했다. 부산시의회는 지난 5월, 경기도의회는 지난달 비슷한 내용의 조례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자체 조례는 면책을 위한 법령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

민·형사상 변상 책임을 면제해주자는 목소리도 높다. 더불어민주당 윤관석 의원이 면책 내용을 담은 소방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1년째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법안 소위에 묶여 있다. 인세진 우송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소방관이 소송에 시달리면 적극적인 업무 수행을 할 수 없어 결국 국민 안전이 위협받는다"며 "소방관이 인명 구조에 집중하도록 면책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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