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박'홍진표 "당구선수가 웬 공부? 공이나 치란 말도.."

2017. 9. 14.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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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선생님이 권해 당구 시작..군시절 '공부 병행' 결심
올들어 4개 대회 연속 입상..전성기 향해 '뚜벅뚜벅'
"LGU+대회 상금 4000만원이요?차 할부금으로 냈죠"
생애 최고 전성기를 맞고 있는 홍진표가 MK빌리어드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당구인생"을 전했다. 테이블에 팔을 기댄 채 활짝 웃고 있는 홍진표.
“브롬달은 동경의 대상이에요. 어릴 때 그 선수 동영상 보고 당구공부했습니다. 3년 전, 청주로 온다는 소식에 바로 달려가 같이 공도 쳐보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어요.”

지난 8월 26일, 홍진표(대전연맹·31)는 MK빌리어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열흘 가량 후인 9월 8일, 홍진표는 ‘2017 LGU+컵 3쿠션마스터스’ 4강전에서 그 브롬달을 꺾었다. 결승에선 자네티에게 아쉽게 패했지만, 홍진표는 이 대회를 계기로 대중들에게 이름 석자를 강하게 각인시켰다.

‘홍 박사’홍진표와의 인터뷰는 서울 강남구 JS당구클럽에서 이뤄졌다. LGU+대회 전이다. 8월 중순께 인터뷰 요청전화할 때부터 그는 의아해했다. “제 인터뷰요? 저보다 명우(조명우 선수)나 행직이(김행직 선수)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요. 하하”

그는 인터뷰를 위해 대전에서 기차타고 서울까지 올라왔다. 인터뷰 초반엔 낯선 듯 쭈뼛거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러면서 그의 ‘당구인생’을 즐겁게 풀어냈다.

▲“당구? 선생님이 권해서…영어영문과도”

홍진표의 아버지는 그가 10살 때 당구장을 차렸다. 자연스럽게 큐를 잡은 그는 4구만 즐길 뿐 3쿠션은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들어간 남대전고에서 체육교사인 최일규 씨를 만났다.

“선생님의 제안으로 당구 특기생이 됐어요. 학교 사정상 당구부는 따로 둘 수가 없어서 저희 당구부는 볼링부에 편입된 채 운동했어요. 국제식 대대도 고1때 처음 접했고, 선수 등록도 그때(2002년) 했죠. 당구 기초는 11살 위 박준영(현 충남연맹 선수) 형님께 많이 배웠어요. 학교에선 체력훈련을 엄청 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제게 인내와 끈기가 생겼어요. 그때에 비하면 군대가 오히려 더 편하더라고요. 하하”

홍진표는 당시 연을 맺은 최일규 선생님을 ‘인생의 은인’으로 생각한단다. 태권도 세계선수권 챔피언 출신인 그는 홍진표에게 스포츠 선수가 세계를 누비기 위해선 영어가 필수라고 항상 상기시켜줬다. 이런 제안에 제자는 대학 전공을 영어영문학과(목원대)로 택했다.

“(선생님은)정말 무서운 분이셨는데, 지금은 자주 연락하고 가끔 식사도 합니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전화로 가장 먼저 축하해주세요. 아직 체육선생님으로 재직 중인데, 지금도 후배들에게 엄하게 대하신데요. 하하.”

고교시절은 그에게 또 하나의 소중한 동료를 남겼다. 친형제처럼 지낸다는 1년 선배 류승우(포켓볼 선수)다. 고교시절 힘든 체력훈련을 마칠 때면 ‘공치러 와서 이게 웬 일이냐’고 서로 푸념하곤 했단다. 지금도 종합대회가 열리면 둘은 같은 방을 쓴다고 한다.

“승우형은 어릴 때부터 ‘신동’소리 많이 듣던 선수였죠. 저는 그보단 조금 늦었지만,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좋은 성적을 냈어요.”

▲고2때 첫 우승…군 시절 ‘대학원 도전’ 결심

홍진표의 첫 입상은 고2때인 2003년 4월 ‘청주오픈’ 3위다. 재능 넘치는 어린 선수의 등장에 당시 한국 당구 관계자들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다음 달엔 전국규모급 오픈대회 우승도 차지했어요. 그 대회 결승에서 안기성 선배님과 붙었습니다. 당시 전국 강자로 손꼽히는 선수셨죠. 어린 나이에 그런 선배를 제치고 우승까지 하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 시기에 국제식 대대 수지 23점에서 27점으로 실력이 빠르게 늘었어요. 당구가 재미있었죠.”

그러던 홍진표는 선수로서 한창인 21살, 입대영장을 받는다. 연습은커녕 당구공을 구경하기도 힘든 환경에서 2년을 보냈다. 하지만 홍진표는 이 시기를 “제게 보약과 같던 의미 있던 시간들”이라고 기억했다.

“군대에서 제 인생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당구선수로 쭉 나가려면 체육전공 지식도 필요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체육과 복수전공, 또 대학원행도 그때 결정했어요. 제가 성격이 급해 생각해놓은 건 빨리 처리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오매불망 전역날만 기다리다 복학한 순간부터 당구와 공부에 제 인생을 걸기 시작했죠.”

다행히 시작이 좋았다. 2008년 전역한 그는 다시 큐를 잡은 지 일주일만에 그해 6월 ‘청주 중부선수권대회’ 우승컵을 든다. 하지만 이 대회를 끝으로 홍진표는 긴 슬럼프의 터널에 빠진다. 전국대회 입상이 3~4년간 전무했다. 홍진표는 “제가 선택한 길을 의심하진 않았지만, 성적이 신통치 않아 당시에 많이 힘들었다”고 기억했다.

▲‘홍 박사’의 푸념 “공이나 치라는 소리 많았죠”

홍진표는 당구인들 사이에서 ‘홍 박사’로 불린다. 대학 졸업 후, 목원대 산업정보대학원 스포츠학과를 거쳐 현재 한양대 체육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당구선수로서는 이례적인 행보다.

하지만 그는 한때 이런 소리까지 들었다. “성적도 못내는 놈이 공부는 무슨. 선수가 공이나 치지” 2008~2011년, 입상이 전무하던 시기였다. 지역에선 이름난 선수였지만, 전국대회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부모님이 다른 길 찾아볼 생각 없냐고 하셨어요. 이해가 갔어요.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으니까요. 돌파구를 찾고 싶어서 2011년 초반, 최제동 선배님(당구선수)을 찾아갔어요. 선배님 계신 원주와 대전을 서너번 왕복하면서 많은 걸 배웠죠. 타격 원리보단 정신적인 부분을 다잡아 주셨어요. 그때 선수생활을 길게 가져가려면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됐죠.”

홍진표는 당구를 처음 시작한다는 자세로 기본기를 다졌다. 그리고 2011년 10월, 당구가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2011 전국체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4년여 만에 얻은 성과였다. 성적에 대한 갈급함이 조금 해소되자 공부에 대한 욕심도 더 생겼다. 그래서 박사과정을 밟기로 결심했다.

“박사과정 밟는 이유는 간단해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잖아요. 물론 선수생활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사회에서 경쟁해야 하는데 남들과 차별화한다면 유리하지 않겠어요? 하하. 그리고 많은 분들이 제가 벌써 박사학위 취득한 줄 아시는데, 아닙니다. 현재 논문 1차 프로포절 결과발표 기다리고 있어요. 진짜 제1호 박사당구선수는 이장희 선배님이세요.”

JS당구클럽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홍진표와 국내 박사당구선수 1호 이장희씨(맨 왼쪽)와 그의 지인 배원호(맨 오른쪽)씨.
(이장희 씨는 이날 인터뷰가 진행된 JS당구클럽 대표다. 서울당구연맹 등록 선수로 활동하면서 박사학위(연세대)까지 취득한 흔치않은 학구파다. 이후 그는 서울당구연맹과 대한당구연맹 전무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홍진표의 행보에 큰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이장희 씨는 “진표는 본인 인생의 선택지를 자신이 설계했다. 이런 선수가 많이 나와야 한다”며 “선수들에게 선배로서 당부하고 싶다.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분야를 두루 접한다면 나중 사회생할에 꼭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까칠한 이미지? 숫기가 없어서…김행직과 친해”

기자가 홍진표를 처음 본 건 지난 6월 양구 국토정중앙배에서다. 경기하던 그가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기자를 제지해 달라고 심판에게 요청했다. 이 때문에 그는 아까운 ‘타임아웃’ 한 개를 날렸다. “기억나요. 죄송해요. 하하.” 분명한 기자의 불찰임에도 오히려 그가 사과했다.

사실 그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많은 걱정을 했다. 평소 그의 이미지는 ‘까도남’(까칠한 도시남) 그 자체다. 그 이유를 홍진표는 “숫기가 없어서”라고 설명했다. 또한 “남에게 먼저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라 친분관계도 좀 제한적”이라며 “친한 선수는 대부분 대전당구연맹 선수들이고, 다른 지역에선 행직이(김행직 선수)가 유일하다”고 했다.

김행직도 친분이 제한적인 선수로 유명하다. 나이차도 6살, 소속 지역도 다른 그 둘이 친해진 계기가 궁금했다.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 작년 초부터 국제대회 나가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친해졌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술자리도 갖고 하다보니 어느새 이런 사이가 됐어요. 요샌 거의 하루 한 번씩 통화하는 것 같아요. 하하. (옷을 만지며)이 티셔츠도 행직이가 포르투월드컵 참가 차 갔던 포르투갈에서 사다준 거예요. 아들 옷도 6벌 사갖고 왔어요.”

▲‘복덩이’ 아들‧딸, 1년새 7000만원 굴러와

김행직이 옷을 선물한 홍진표의 아들 우진군은 지인들에게 ‘복덩이’로 불린다.

박사과정과 선수생활을 병행하던 홍진표는 작년 6월, 선수생활의 큰 변곡점을 맞는다. 우승상금 3000만원 ‘잔카세이프티배’ 정상에 오른 것. 그해 3월 결혼한 홍진표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우승의 큰 원동력이 됐다”고 밝혔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경사가 이어졌다. 잔카세이프티배 우승 두 달 뒤 아들 우진군이 세상에 나왔다.

“우진이가 ‘복덩이’란 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리고 잔카세이프티 상금과 관련한 얘기 중 정정할 게 있어요. 작년 7월 오픈한 제 당구클럽이 대회 상금을 밑천삼아 차렸다는 기사가 있는데, 사실 그 전에 계약했고, 대회 끝나자마자 오픈한 거예요. 하하.”

홍진표는 잔카세이프티배 우승을 기점으로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특히 올해 6~7월 두 달간 출전한 3개의 주요 대회 모두 입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올 6월 ‘양구 국토정중앙배’ 공동3위, 7월 ‘정읍 단풍미인배’ 준우승 및 ‘서천 충남도지사배’ 2관왕 등 나가는 대회마다 입상권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 국내랭킹도 그의 생애 최고인 3위.

“올해 좋은 성적 내는 이유도 ‘복덩이 효과’인가 봐요. 다음 달에 딸이 태어나거든요. 딸을 원하는 마음에 태명을 ‘딸기’로 지었죠.”

복덩이 ‘딸기’의 효과는 지난 8일 끝난 ‘2017 LG U+컵 3쿠션 마스터스’에서도 유효했다. 홍진표가 국내외 최강자들을 물리치고 결승까지 오른 것. 아쉽게 결승에선 마르코 자네티에게 패했지만, 준우승 상금 4000만원을 거머쥐었다.

“상금으로 뭐 했냐고요? 차 할부금으로 다 냈어요. LGU+컵 전 차를 계약했는데, 상금액수가 딱 차 가격이더라고요. 딸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행직과의 친분 이야기를 하던 중 활짝 웃고 있는 홍진표.
▲“뒤돌려치기로 감 잡아…매일 아침 7시 기상”

요즘 홍진표는 당구선수, 한 집안의 가장, 당구클럽 대표 등 1인3역 중이다.

“가장 힘든 건 클럽 운영입니다. 테이블 4대 소규모인데도 신경쓸 게 엄청 많아요. 다행이 최근엔 손님들도 저와 함께 연습하는 분위기가 돼 여유가 좀 생겼어요. 초반에 일반 클럽처럼 운영했더니 제 연습시간이 없어서 바꾸었습니다. 큰 규모 클럽은 나중에 선수생활 후에 해보려고요. 너무 욕심내면 가족과 선수생활에 소홀해 질 것 같아요.”

최근 상승세인 그의 연습법과 감각유지 비법이 궁금해졌다.

“개인연습량은 클럽 운영하면서 조금 줄어서 2시간 정도 됩니다. 테이블 닦아줘야 하니까. 하하. 큐 감각유지를 위한 저만의 방법은 뒤돌려치기를 해봐요. 상대적으로 쉬운 배치의 볼을 치며 좋은 타격감을 찾아가는 거죠. 그리고 섬세한 힘조절이 필요한 샷도 시도해봐요. 저는 공을 세게 쳐서 제각돌리기 등엔 약하거든요.”

이와 함께 홍진표는 ‘규칙적인 생활’도 본인 컨디션 관리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그는 잠자는 시간이 불규칙해도 항상 아침 7시에 기상해 하루를 시작한다. 고교때부터 몸에 베인 습관이다.

“전날 3~4시에 잠들어도 항상 그 시간에 눈이 떠져요. 잠을 푹 못자 가끔 힘들때도 있지만, 전 이게 제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를 규칙적으로 사용할 수 있잖아요. 전 기술이 뛰어난 선수가 아니라 매일 일정한 양을 꼭 연습해야 감각이 유지됩니다. 또 생활패턴이 뒤죽박죽 되면 가족들, 특히 아이와 마주할 시간도 멀어질 것 같아요.”

가족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얼굴엔 다양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출장이 잦은 당구선수를 남편, 부모로 둔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 당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집념 등이 느껴졌다.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싶어요. 또 당구선수를 떠나 사회인으로서 대인관계를 많이 넓혀나갈 생각입니다. 예전부터 그래왔듯, 제가 추구하는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홍진표의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MK빌리어드뉴스 이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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