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북한의 대남비서傳(4)] 춤 때문에 곤욕을 치른 김용순

고수석 입력 2017.09.14. 07:00 수정 2017.09.1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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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잘 부르고 특히 춤을 잘 춰
84년 노동당 청사에서 춤판 벌여 철칙
김정일 술 파티에 빠지지 않고 참석
김정일 여동생 김경희와 염문설도
2000년 남북정상회담 끝나고
3개월 뒤 서울 방문해 대통령 만나
2003년 지방 출장갔다고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132일만에 숨져

한국 사람들이 북한의 대남비서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김용순(1934~2003)이다. 분단 이후 최초로 열린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국민들은 처음으로 대남비서를 TV로 확인했다. 그 이전에 서울을 방문했던 허담·윤기복 등은 비밀리에 대통령을 만나고 갔기 때문에 국민들은 알 수 없었다.

김용순 대남비서(왼쪽 끝)가 2000년 8월 평양에서 한국언론사대표단을 만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집 영도자와 인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키 큰 비서’ ‘다문박식한 외교관’이라고 부른 김용순은 54년 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국제관계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이후 당 국제부에 첫 발을 내딛고 70년 주 이집트 대사로 나갔다. 북-루마니아 친선협회 위원장을 거쳐 74년 6월 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김용순에게 행운이 찾아온 것은 83년 10월 아웅산 테러 사건이었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자 서둘러 대규모 인사를 단행됐다. 김영남(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국제비서가 외교부장으로 가고 김용순이 83년 12월 부부장에서 국제비서로 승진했다.

김용순이 승진한 배경에는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김경희 당 국제부 과장이 있었다. 김경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으로 김용순과 ‘바람이 났다’고 소문날 정도로 사이좋게 지냈다. 김용순은 노래가 전문가 수준이었고 특히 춤을 잘 추었다. 따라서 김정일의 술 파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였다.

그런데 춤이 그에게 화근이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 따르면 김용순은 국제부 직원들에게 외국손님을 가정에 초대해 외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부인들까지도 춤을 출 줄 알아야 한다면서 직원 부인들을 노동당 청사에 모아놓고 춤판을 벌였다.

이 춤판은 문제가 됐고 김용순은 84년 10월 결국 철칙돼 평안남도 덕천탄광 노동자로 쫓겨났다. 몇 개월 동안 탄광노동자로 고생한 뒤 그의 ‘수호천사’였던 김경희 도움으로 김일성고급당학교로 돌아온 김용순은 87년 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복귀했다. 김일성은 김용순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김용순이 아첨기가 심해 그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딸바보’였던 김일성이 김경희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김용순 대남비서(오른쪽 끝)가 1999년 9월 자강도 낭림군에 새로 건설된 문화주택을 현지지도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를 메모하고 있다. [사진집 영도자와 인민]
김용순의 복귀로 당 국제부는 황장엽 국제비서, 국제부 제1부부장, 김용순 부부장 등으로 삼파전이 벌어졌다. 국제비서가 되려던 김용순과 제1부부장의 세력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황장엽은 회고록에서 “제1부부장과 김용순의 세력다툼에서 김용순이 이길 것으로 내다봤다”고 기록했다.

황장엽의 예상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황장엽이 88년 국제비서에서 물러나면서 김용순이 국제부장이 됐다. 대개는 대남비서가 통일전선부장을 겸임하듯이 국제비서와 국제담당도 한 사람이 다 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춤꾼’인 김용순에게만 국제부를 맡길 수 없어 허담 국제비서-김용순 국제부장 체제로 운영했다.

허담은 국제비서를 맡았지만 건강악화로 비서업무를 거의 수행하지 못했다. 결국 김용순이 90년 5월 국제비서로 승진했다. 그는 국제비서로 있으면서 몇 가지 큰 일을 해냈다.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가네마루 신과 다나베 마코토 일본 사회당 대표를 평양으로 초청해 조선노동당과 함께 ‘북일 수교 3당 공동선언문’을 만들었다.

또한 김용순은 92년 1월 미국을 방문해 아놀드 캔터 국무부 정무차관을 만나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핵안전협정을 체결하는 사전조율을 마무리했다. 북한은 김용순-캔터 회담 이후 8일 만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IAEA 핵안전협정에 서명했다. 김용순은 캔터를 만나 주한미군이 한반도 통일 후에도 지역의 세력균형과 안보를 위해 주둔이 필요하다고 전달했다. 이 얘기는 김정일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전달했다.

김용순은 92년 12월 대남비서로 옮겼다. 그 이후 사망하기까지 11년 동안 대남비서를 맡았으며 선배인 김중린 다음으로 그 자리를 오래 차지했다. 그가 대남비서를 맡았을 때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김용순은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지 3개월만에 김정일의 특사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고 제주도를 방문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사진 오른쪽)이 2000년 9월 청와대를 방문한 김용순 북한 대남비서와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노동신문은 2008년 11월 17일 2면에 그를 추모하는 기사에서 “김용순이 출퇴근시간에 단어장을 들고 외국어를 익혔고 단 몇 분이라도 시간이 나면 책을 들여다보았다”고 학습의욕을 높게 평가했다. 아울러 외국에 출장을 갈 때는 가방에 읽을 책부터 챙겼다고 기록했다. 책 읽기를 좋아해서인지 생전에 『첫 봄』, 『믿음과 삶』 등의 단행본을 출간했고, 노래 ‘영생의 모습’을 작사하기도 했다.

김용순은 2003년 6월 16일 지방에 나갔다가 사업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병원에 입원한 지 132일이 지난 그해 10월 26일 숨졌다. 김정일은 그가 사망한 이후 그를 잊지 못하고 자주 회고했다고 노동신문이 2008년 11월 17일에 밝혔다. 김정일은 2008년 8월 “김용순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지금 한 몫 단단히 할 것”이라고 회고했다. 김정일은 당시 뇌졸중이 일어나 감상적일 때가 늘면서 옛날 측근들을 그리워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 개회사를 하면서 허담·김중린 등과 함께 김용순을 언급했다. 그리고 김정은이 호명한 사람들의 일대기를 담은 기록영화 ‘영생하는 우리 당의 혁명 전우들’이란 제목으로 시리즈 만들었다. 김용순도 ‘당중앙위원회 비서였던 김용순’ 편으로 제작됐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