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명까지 물려준 장발 학장에게 '충성' 다했으나.."

입력 2017. 9. 14. 02:46 수정 2018. 1. 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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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길을 찾아서】 (33) 서울대 미술대와 장발 학장

1954년 초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온 김병기는 서울대 미술대 장발 학장에게 발탁돼 전임강사 활동을 시작했다. 55~56년 무렵 서울대 미대 제5회 전시회 때 한자리에 모인 교수진. 앞줄 왼쪽부터 송병돈, 이순석, 장발, 노수현, 장우성. 뒷줄 왼쪽부터 김종영, 박갑성, 김흥수, 김정환, 백태원, 박세원, 김병기, 김세중의 모습. 미술평론가 이구열이 발굴해 한국미술기록보존소에 기증한 사진이다.

-부산 피난 시절을 마감하고 상경했는데, 어떻게 서울 정착을 했는가?

“휴전이 되고 1954년 초 상경했지만, 내 생애 최악의 경제난으로 고생해야 했다. 퇴계로 남산 쪽 필동의 적산가옥 2층에 세를 들었다. 하루는 2층으로 양동이를 나르다 계단에서 넘어져 평생 디스크 환자로 살 뻔했다. 어머니의 간호로 다행히 치료는 했지만 정말 고통스러운 서울 생활의 나날이었다. 그런 와중에 서울대 미술대에서 장발 학장이 불러 전임강사로 취직하게 되었다. 부산 시절 나는 두 차례에 걸쳐 송도 서울대 미대 임시교사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피카소와의 결별>을 발표한 이후, ‘다방에서 예술론을 강의하지 말고 강단에서 하라’ 해서 서울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서울대에 나가기는 했지만 월급은 생활비의 절반에도 모자랐다. 5명 아이들의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아내가 계모임 같은 비상수단을 발휘해 꾸려 나갔다. 그럴 때 세브란스병원의 대표였던 문병기의 부인 손인실(훗날 YWCA 대표)이 주선하여 주한 미국대사관의 외교관 부인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용돈은 생겼지만 교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간에 아내가 돌연 가출해버렸다. 한 열흘쯤 뒤에야 행방을 알게 되었는데, 그사이 아내는 정릉 청수장 계곡에서 평양 동창생과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있었다. 그 덕택에 우리는 정릉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내가 65년 미국으로 갈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정릉에 가보니 부산 도깨비시장에서 시계장사로 만났던 박고석이 이웃에 살고 있었다. 그의 집도 살기 어려워 유원지에서 김밥장사를 한다고 했다. 또 이웃에 소설가 박경리도 있었다. 어느 날 박경리의 부탁으로 그의 딸(김영주)에게 미술 레슨을 해주기로 했다. 그나마 아내가 홀로 사는 박경리를 경계하는 바람에 단 한 차례로 멈춰야 했다. 그 딸은 뒤에 시인 김지하의 부인이 되었다.”

1954년초 서울 환도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던 김병기 가족은 서울 정릉 청수장 계곡에 판잣집을 지어 정착했다. 그때 이웃에 화가 박고석(맨 오른쪽)과 작가 박경리(가운데)도 살고 있었다. 57년 9월 이중섭 1주기 때 정릉에서 함께한 모습으로 승려 시절의 시인 고은(왼쪽)도 보인다. 사진 박고석 유가족 제공.
김병기는 정릉 시절 이웃 박경리(오른쪽)의 외동딸 김영주(왼쪽)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다. 1973년 시인 김지하와 결혼할 무렵 김영주와 박경리가 정릉 집에서 함께 한 모습. 사진 원주 토지문화관 제공.

-국립 서울대는 1946년 7월 미군정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을 발표하면서 이루어졌다. 대학은 기왕에 존재하던 경성제대 등의 학교 시설을 흡수·통합했고, 미술 분야만 신설했다. ‘국대안’ 찬반으로 좌우익 이데올로기 쟁투라는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예술대학의 초대 미술부장이자, 1953년 미술대학 승격 이후 초대 학장은 장발(1901~2001)이었다. 그는 도쿄미술학교를 중퇴하고 뉴욕 컬럼비아대학을 수료한 뒤 46년 귀국해 대학 창설 당시 서울시 학무과장을 지냈다. 그는 46년부터 61년까지 미대 학장 등을 지내면서 미대의 실세로 장기간 군림했다. 장발 학장과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독실한 가톨릭 집안 출신인 장면·장발 형제는 1920년대미국 유학시절 뉴욕에서 프란치스칸이 됐다. 특히 3남4녀 중 둘째딸 장정온 악니다는 메리놀수녀회의 첫 동양인으로 한국전쟁 때 평양에서 순교했다. 장면(맨오른쪽)의 뉴욕 맨해튼대학 유학 때 장발(뒷줄 왼쪽), 장정온 수녀(맨왼쪽), 장면의 처조카 김교임 마르가리타 수녀(앞줄 오른쪽).

“장발 학장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 출신의 신자였다.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이 친형이고, 그 셋째 아들인 장익 주교는 조카가 된다. 장발은 <김대건 신부상>(1920), <성녀 김골롬바와 아녜스 자매>(1925) 같은 작품을 남겼지만, 명동성당의 제단 벽화처럼 주로 대형 벽화나 제단화 제작에 열중했다. 한마디로 장발은 한국 가톨릭미술의 대부라 할 수 있다. 서울대 미대만 해도, 가톨릭 신자가 아니면 교수 후보에도 들지 못했다. 아마 가톨릭 신자가 아니면서 전임이 된 건 내가 처음일 것이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니 장발 학장은 모태 기독교도인 나에게 가톨릭으로 오라고 강요했다. 그래서 54년부터 1년 동안 명동성당에 다니면서 가톨릭 교리를 배웠다. 1년 뒤 나는 장발 대부 아래 가톨릭에 입교했다. 그때 장발은 내게 자신의 세례명인 ‘루도비코’(Louis)를 물려주었다. 장발은 대부 노릇을 많이 했지만, 자신의 세례명까지 물려준 예는 없다고 했다. 그는 나를 후계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세례받을 때, 성수(聖水)를 귀에 대니 너무 뜨거워 움칠한 기억이 있다. 성수는 분명히 찬물이었을 텐데, 세례라는 의례가 특이 체험을 하게 했다. 사실 어머니는 평양 장로교회의 독실한 신자였고 나는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아버지(김찬영)는 영세를 받아 세례명을 ‘루카’라 했다. 루카는 그림 그리는 제자의 이름이라 했다. 나의 형님(김병룡)도 가톨릭에 귀의해 세례명이 ‘요셉’이었다. 형님은 일찍이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나선 사회주의자였으나 해방 이후 진주한 소련군이 소녀를 강간하는 장면을 보고 사회주의를 포기했다.

장발 학장은 서울대, 홍익대 교수들로 서울미술가회를 꾸리고 1954년 10월 ‘성(聖)미술전람회’를 개최하는 등 가톨릭미술 활동을 주도했다. 54년 10월5일 서울 미도파백화점 5층 화랑에서 열린 ‘성미술전람회’ 개막식에는 노기남(맨 왼쪽) 서울대교구 대주교를 비롯한 가톨릭 성직자들이 참석해 관람했다. 노기남 대주교 화집에 실려 있다.

장발 학장과의 인연은 1947년 월남 이후 한국문화연구소 때부터 비롯되었다. 연구소의 이사인 장발과 김환기의 추천으로 내가 상임이사 겸 선전국장으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50년미술협회를 조직할 때, 우익 대표 격인 장발을 찾아간 것이 본격적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유능한 사람이면 으레 좌익으로 보는 ‘편견 아닌 편견’이 있었다. 작가로서 창작 활동은 활발한 편이 아니었지만, 가톨릭미술 발전에는 공로가 있다고 본다. 그는 서울미술가회를 꾸려 1954년 10월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성(聖)미술전람회’를 주도했다. 그때 출품한 작가는 장발을 비롯해 정창섭, 노수현, 배렴, 서세옥, 김종영, 김세중, 이순석 등이었다. 나도 그 전시에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큰 작품이어서 이화여고 강당에서 그렸다. 전통적 성화와 거리가 있고, 직선을 많이 활용하여 거칠게 예수를 표현했다. 불경스럽게도, 내 안에 깃들어 있는 ‘돌아온 탕자’ 같은 감성을 그렇게 표현했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작가 미상으로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 전례박물관 창고에 방치되고 있다가 2013년에야 발견되었다. 나로서는 기념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병기가 1954년 <성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2013년 정수경 인천가톨릭대 교수가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의 전례박물관 창고에서 발견해 ‘2016년 병인년 순교 150주년-한국 가톨릭 성미술 재조명’ 전시회에서 62년 만에 다시 소개됐다.
1954년 ‘성미술전람회’에는 조각가 김종영, 공예가 이순석, 동양화가 장우성 등 당대 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 24명이 31점을 출품했으나 6점 이외 대부분 유실된 상태다. 당시 전람회장에서 출품작 ‘복녀 김골롬바와 아녜스’ 옆에 서 있는 조각가 김세중. 사진 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제공.

1954년초 상경해 필동 적산가옥살이
장발 ‘발탁’ 서울대 미대 전임강사로
“박봉에 다섯아이 끼니조차 힘겨워”
가출 감행한 아내 정릉에 판잣집 지어 ‘정착’
이웃에 박고석·박경리 등 예술인들

독실한 가톨릭신자 ‘실세’ 장발 권유
“형인 장면 아들 장익 주교에게 교리”
세례 때 대부로…세례명 ‘루도비코’도 받아

1954년 장발 주도로 ‘성미술전람회’
정창섭·서세옥·김종영·김세중 등 24명
김병기 출품작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2013년 가톨릭대 창고서 찾아 재전시”

1957년 이승만계 국민회 문화부장에
“지인이 천거했는데 장면 ‘도전’ 오해”
부교수에서 전임 ‘강등’ 서울예고로 ‘좌천’

장발을 가톨릭미술의 선구자로 불리게 한 대표작 ‘김대건 신부상’. 1920년 19살 때 용산중학교 교장 기낭 신부의 사제수품 은경축 기념으로 그렸다.
장발은 1961년 5·16 쿠데타로 친형 장면 국무총리가 실각한 여파로 64년 미국으로 이주해 2001년 100살로 피츠버그에서 삶을 마쳤다. 75년 부활의 상징인 나비를 그려 넣은 자화상. 2011년 10주기 때 아들 장흔 신부가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기증한 유작 가운데 하나다.

장발은 1960년 4·19 혁명 때 ‘미대 권력’으로 찍혀 퇴진운동의 주인공으로 부상되기도 했다. 김지하의 글에도 그런 내용이 남아 있다. 그는 장면 총리 시절인 61년 이탈리아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됐으나 현지 발령 대기 중 5·16 쿠데타로 무산되기도 했다. 그 뒤 그는 64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피츠버그에서 100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만년에 추상회화로 서울에서 개인전을 연 적도 있다. 현재 서울대 미대 교정에는 그의 흉상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흉상의 비문 내용은 이렇다. “우석(雨石) 장발 선생께서는 1901년에 나시어 1946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설립에 이바지하셨고 초대 미술학부장에 선임되어 재임하시는 동안 미술대학 초대 학장에 취임하여 1961년까지 연임하시는 동안 이 나라 화단의 동량이 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셨으며 미술대학 발전을 위해 혼신의 열정과 애정을 바치셨다. 선생의 공로를 기리고 후학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서울대학교에서는 개교 50주년을 맞아 선생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하였다. 미술대학 교수들과 동문들은 선생의 공로와 학은을 기리기 위해 뜻을 모아 선생의 상을 세운다”(1996).

김병기는 1954년부터 57년 서울예고로 파견되기 전까지 서울대 미대에서 ‘현대미술 형성론’을 강의하고 4학년생 실기도 지도했다. 56년 3월 동숭동 미대 건물에 합격자 명단을 붙이고 있다. 사진 서울대미술관 제공.

-서울대 미대에서 무슨 강의를 했고, 어떤 교육관을 갖고 있었는가?

“처음에는 현대미술 형성론을 강의했다. 특정 텍스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는 이론을 하나씩 꺼내 소개했다. 현대미술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런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사실 나는 도쿄 유학 시절부터 현대미술 이론 공부에 열중한 편이었다. 뒤에 미술평론가로도 활동했지만 미술이론은 내게 하나의 재산 혹은 무기처럼 작동하기도 했다. 장발 학장이 르네상스 시대 이전의 서양 고대미술을 담당했고, 나는 근현대미술을 맡았다. 거기에 4학년 학생들의 실기를 지도하기도 했다. 이용환, 김태, 박근자, 전상수 그리고 조영익 등이 그때 수강생이었다.

난 서울대에 있을 때, 귀스타브 모로 같은 교육자가 되려고 했다. 학생들의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지도하고, 그들의 창의성을 중요하게 보려 했다. 모로가 그랬다. 학생들에게 ‘너는 이것이 틀렸다’고 지적하면, 위축돼서 좋지 않다. 나는 학생의 장점을 이야기해주려 했다. 아주 좋을 때는 말이 없어진다. 정말 좋으면 말을 못한다. 내가 서울대에서 집중적으로 가르친 것은 사실적 그림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예술론이었다. 그것이 현대회화의 형성론이었다. 현대미술이 어떻게 해서 추상이 되고 초현실이 되는가. 초현실이라는 게 상당히 중요하다. 추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추상은 외형적인 것이고 초현실은 내부적인 것이다. 이 내부적인 것과 밖의 형식적인 것이 서로 얽히고설킨 것이 현대미술이다. 추상이라는 것은 본래가 어떤 통속적이라든가 정서적인 것이라든가, 뭐 이런 것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1996년 서울대 미대 개교 50돌 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선정 기념으로 예술관 54동 옆에 세워진 장발 초대 학장의 흉상. 고 박세원 전 미대 교수가 전면 글씨를 쓰고 최의형 명예교수가 제작했다. ‘친일 행적과 철거 논란’으로 김민수 교수 해직사태를 빚기도 했다.

-그러다 장발 학장과 결별하고 서울예고로 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사실 나는 장발 학장에게 충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쟁 때 인민군 치하의 일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인민군의 문화예술 분야 지휘부로 연안파의 거물 장진광이 있었다. 그는 하와이 출신으로 서구문화 경험도 있었다.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명륜동의 임경일 교수(숙명여대) 집에 피신하던 나는, 그래도 친구 문학수에게만은 알려야 했다. 그래서 찾아가보니, 장진광과 문학수가 집무하던 집이 하필이면 장발 학장의 자택이었다. 점령군으로서 대저택을 징발한 셈이었다. 집 안에 들어가니 어수선한 상태에서 책들이 방구석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주인은 피난 가고, 거기서 문학수를 만난 것이 양심상 가책으로 남았다. 그 이유를 딱히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나름대로 보답이랄까 속죄랄까, 휴전 이후 장발에게 잘하려 애썼다.

그 무렵 미술계는 이른바 서울대파와 홍익대파로 양분되어 싸움이 심했다. 물론 서울대파의 우두머리는 장발이었다. 나는 장발의 대변인 격이었는데, 하루는 이승만 계열의 국민회에서 나한테 감투를 씌웠다. 선임 임경일 교수가 영전을 하면서 나를 후임 문화부장으로 천거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신문에서 본 장발은 내가 자신에게 도전하려는 것으로 오해를 했다. 1957년께였나, 하루는 대학에 출근하니 조교수 자리에서 전임강사 자리로 강등돼 있었다. 상상 밖의 일이었다. 장발의 보복(?)이었다. 솔직히 그의 권위의식과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아무리 내가 해명과 호소와 항의를 해도 그의 마음은 이미 떠나 있었다. 정말 나는 장발을 배반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결국 나는 신설 서울예술고등학교로 옮겨야 했다.

사실 예고는 장발 학장이 나에게 자매학교처럼 ‘예고’ 하나를 만들라면서 겸직으로 파견 보낸 곳이었다. 서울예고는 김흥수가 발판을 닦고 있었다. 나는 김흥수를 서울대 강사로 추천한 인연이 있었다. 서울예고는 음악·미술·무용의 세 분야 중심의 학부 체제였다. 모태였던 이화여고는 전통적으로 음악이 강세였다. 그래서 지휘자인 임원식이 교장을 맡았고, 나는 미술과장이 되었다. 하지만 서울대 교수 출신에 사회 경력이 많았던 나와 그렇지 않았던 임원식은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게다가 미술학과 강사 중에서도 교장 편을 들면서 나를 괴롭히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김창열 등 많은 인재를 예고 교강사로 초빙하여 일류 예술전문학교 만들기에 진력을 다했다.”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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