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관객 파워 .. '강제 개봉'된 영화들

김호정 입력 2017.09.14. 01:02 수정 2017.09.14.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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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상영 '좋아해, 너를' 등
묻혀있던 작품들, 관객 요구로 햇빛
페북 돌풍 '겟아웃'은 200만 넘어
"한국서 통하는 흥행 포인트 달라져"
전주국제영화제에서의 호평이 개봉으로 이어진 스페인 스릴러 ‘인비저블 게스트’.[사진 각 수입사]
영화 ‘인비저블 게스트’는 지난 4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밤 늦게 상영되는 ‘미드나이트 시네마’ 중 하나였다. 상영 후 인터넷엔 이런 리뷰들이 올라왔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졸면서 볼 줄 알았는데 잠이 확 깼다.” “다른 영화 보려다 시간이 안 맞아 예매했는데 안 봤으면 후회할 뻔했다.” 특히 “개봉하면 다시 보고 싶다”는 반응이 많았다.

영화 수입사인 더블앤조이픽쳐스 측은 “스페인의 스릴러라는 낯선 영화라 수입을 망설였지만 미리 나온 호평에 따라 개봉을 결정했다”고 했다. 두 사람의 죽음을 둘러싸고 반전이 여러 번 반복되는 이 영화는 이달 21일 개봉을 확정했다. 2월 미국 포틀랜드 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지만 스페인을 제외하면 남미·독일·대만 정도에서만 개봉된 영화다.

‘프로듀스101’으로 인기가 급상승한 뉴이스트 주연의 ‘좋아해, 너를’도 관객 요청으로 개봉됐다.
영화 ‘좋아해, 너를’은 지난해 일본에서 개봉한, 일본 정서를 담은 영화다. 남녀 다섯명의 엇갈리는 사랑을 담고 있지만 일본 특유의 예측 불가한 전개, 귀여운 캐릭터 같은 요소 때문에 국내 개봉은 확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에 출연한 아이돌 그룹 뉴이스트가 Mnet의 예능 ‘프로듀스 101’ 시즌 2에서 인기를 얻으며 팬들의 ‘좋아해, 너를’ 개봉 요청이 시작됐다. 5월엔 이 영화의 상영관 확보를 위한 크라우드 펀딩을 시도했고 총 6717만원이 모였다. 영화는 14일 개봉관을 75개로 확정할 수 있었다.
미국에선 흥행참패작에 가까웠으나 국내 관객의 요청으로 7년 만에 개봉한 ‘플립’.[사진 각 수입사]
두 영화는 ‘강제개봉작’의 대열에 새로 합류한 작품들이다. 관객들의 영화 강제개봉은 올해 들어 눈에 띄게 늘어났다. 7월 개봉한 ‘플립’은 2010년 미국 상영관 45곳에서 개봉한 작은 영화였다. 제작비 1400만 달러(약 157억 원)에 매출 175만 달러(약 19억 원)로 미국에선 흥행 참패작에 가까웠다. 하지만 국내 영화 사이트에서는 개봉도 하지 않은 이 영화에 대한 리뷰가 2000개 넘게 달려있었다.

결국 ‘플립’을 수입해 개봉한 회사 팝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VOD와 불법 다운로드로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호평 릴레이를 이어갔다”고 전했다. 영화는 결국 미국 개봉 7년 만에 한국 상영관에도 걸렸고 총 35만 명이 봤다. 새롭거나 기발한 내용 대신 10대 소년·소녀들의 사랑스러운 성장기를 담은 영화다. 최근 한국 영화관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무공해 스토리에 대한 관객의 수요를 확인한 셈이다.

‘관객 강제개봉’의 대표적인 흥행사례로 꼽히는 ‘겟아웃’. [사진 각 수입사]
이처럼 묻혀있던 작품을 강제개봉 시킨 관객들은 영화를 흥행시키며 책임을 진다. 올 5월 개봉한 미국 영화 ‘겟아웃’은 한국에서 유독 흥행 스코어가 좋았다. 관객 213만 명이 들었고 매출 174억원을 기록했다.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 성적 중 1위다.

‘겟아웃’은 개인이 운영하는 페이스북 영화 페이지의 영향으로 개봉했다. 2월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 국내 상영 계획은 없었다. 따라서 예고편도 미국에서만 공개됐지만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현지의 예고편이 곧바로 업로드 됐고 댓글 7만개, 조회수 200만을 기록했다. 이 영화 배급사인 UPI코리아의 조예정 부장은 “영화의 메인 테마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었고 공포에 블랙 코미디가 섞인 애매한 장르였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판단해 개봉 계획이 없었다”며 “하지만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고 개봉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유명한 배우도 없고 장르도 독특한 이 영화도 강제개봉의 흥행사례로 기록됐다.

‘한국에서는 안되는 영화’라는 관념 또한 강제개봉이 깨뜨려가고 있다. 6월 개봉한 ‘지랄발광 17세’는 국내에서 맥이 끊어지다시피한 하이틴 코미디다. 지난해 9월 미국에서 개봉한 후 소니픽처스는 한국에서는 DVD 출시만 계획했다. 하지만 예고편의 조회수가 100만을 넘어서고 비행기에서 본 관객의 호평까지 가세해 흥행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소니픽처스는 미리 만들어놨던 DVD를 발매 예정 하루 전에 모두 폐기하고 극장 상영을 결정했다. “유머 코드가 너무 미국적이고 흥행 파워 있는 배우도 없다”며 한국 상영을 미뤘던 이 영화는 국내 관객 8만3000명을 모았다.

‘지랄발광 17세’를 홍보한 모비의 이은하 실장은 “이제 한국에서 안 통하는 유머 코드, 흥행 포인트 등의 공식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고 했다. ‘겟아웃’의 공포 코드도 마찬가지다. UPI코리아의 조예정 부장은 “한국 관객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열려있고 여러 장르의 다양한 내용을 받아들인다는 점이 뚜렷해지고 있다”며 “예전에는 고려도 안 했을만한 영화들의 국내 개봉을 더 넓게 검토하고 고민하는 풍토가 생겼다”고 했다. 소니픽처스의 박소영 과장은 “관객들의 선택이 선명하게 보이게 됐기 때문에 배급과 마케팅의 의사결정 구조도 앞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