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맞선 예술가도 '누드'의 벽을 넘진 못했다

이상기 2017. 9. 1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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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누드의 개척자 소원 문은희 화백의 그림 인생 18] 작품 정리

[오마이뉴스 글:이상기, 편집:이주영]

 최근의 누드 콜라주 작업
ⓒ 이상기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문은희 화백은 서울과 소통하고 접촉하면서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기획·전시·판매 등 모든 일이 서울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과의 접촉과 교류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다고 로비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문은희 화백은 모든 것을 접고 충주화실에서 예술가로서의 마지막 삶을 영위하기로 마음먹는다. 산 좋고 물 좋은 고장에서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우기로.
그러나 2000년대 후반 누드 콜라주 외에는 별다른 예술적 진척을 이뤄내지 못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뚜렷한 자극이나 동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나이가 들어 근력과 기력이 떨어지며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예술작업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다. 정신적인 노동이며 동시에 육체적인 노동이다. 문 화백에게는 이 두 가지 다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품 분류
ⓒ 문은희
결국 문 화백은 시간 여유를 가지고 가끔 누드 콜라주 작업을 할 뿐이다. 지공예도 가능하지만 종이를 찢은 다음 풀을 먹여 만들어가는 작업에 품이 너무 들어 쉽지가 않다. 지공예를 하면서 만져지는 종이의 감촉을 생각하면 지금도 지공예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웃에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시골은 이제 점점 더 황폐화되어 가고 있다. 젊은이들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2008년에 문은희 화백은 자식들의 도움을 받아 작품정리 작업에 착수한다. 그것은 자신이 한 평생을 바친 예술에 대한 회고와 정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위해서다. 정리 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문 화백, 큰 아들 황문연, 둘째 아들 황태연, 사위 김진하다. 이들은 먼저 업무분장을 한다. 문화백이 그림을 작품성에 따라 미술관용, 소장용, 판매용, 기증용으로 나눈다. 이를 토대로 자식들이 작품을 정리, 분류, 기록한다.
 유형별 분류
ⓒ 문은희
정리의 첫 작업은 그림을 유형별로 분류하는 일이다. 여러 번의 수정과 협의를 거쳐 예술작품을 스케치, 추상, 풍경, 감, 국화와 해바라기, 수묵 누드, 누드 병풍과 군상, 누드 콜라주, 도자기, 공예, 시서화, 기타로 분류했다. 이 중 작품수가 많은 것은 스케치, 감, 수묵 누드다. 스케치는 다시 꽃, 동물, 인물, 정물로 나뉜다. 감은 크기나 형태로 나뉜다. 수묵 누드는 등급으로 나누고, 등급별로 일련번호를 매긴다.
수묵 누드는 또한 자세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앉은 자세, 선 자세, 누운 자세, 엎드린 자세, 뒷태 등. 그러나 이렇게 분류하기에 애매한 작품이 있어, 나중에는 이 분류를 포기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분류는 예술적이기보다는 기계적이기 때문이다. 또 누드를 크기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작품수를 파악하는 정도로 하고 더 이상 시도하지 않는다.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작품 기록
ⓒ 문은희
더욱 더 어려운 일은 수묵 누드를 연도별로 정리하는 일이다. 그림에 연도가 표기되어 있는 경우는 별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절반 정도만 연도가 표기되어 있다. 표기가 없는 경우에는 문 화백에게 그린 연도를 문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 화백이 연도를 정확히 모르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면 몇 가지 기준을 정해 양식이나 유형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나서 좀 더 세부적인 기준을 정해 연도를 결정한다.

또 작품 사진을 찍은 다음 그것을 출력해 칠판이나 유리창에 붙여 네 사람이 의견을 제시한 다음 연도를 결정하기도 한다. 수묵 누드의 경우 작품 제작연도 순으로 일련번호를 매겨보려 시도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것은 번호에서 제외해야 할 작품을 결정하기가 정말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련번호에서 제외되면 예술목록에서 빠지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정리와 분류 작업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완벽을 기하기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자식들이 없었으면 그 일을 어떻게 해'
 작은 아들 황태연
ⓒ 문은희
예술작품 분류와 정리 작업은 또한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작업을 위해 자식들이 함께 모이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미술을 전공한 작은 아들이 가까이 살면서 이 일을 주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에서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던 황태연씨는 어머니의 요구로 국내에 들어와, 자신의 전공인 목공예 작업을 하면서 어머니 일을 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려 문 화백의 예술작품은 정리될 수 있었다.
2014년 초 문화백의 작품은 디지털 파일 형태로 정리되었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해 문 화백을 소개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 일은 사위인 김진하가 맡아서 했다. 그는 인사동에서 나무화랑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술계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도 있고 인맥도 많은 편이다. 이를 통해 그 동안 문 화백을 알리는 일에 앞장섰고 또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미술의 대중화에도 힘을 기울여 왔다.
 큰 아들 황문연
ⓒ 이상기
큰 아들은 행정학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문화백의 살림살이를 맡아 하고 있다. 아틀리에 화암화실의 관리, 외출시 운전 및 수행, 공과금 납부와 우편물 처리 같은 행정적인 일, 전시회 때 작품의 운반 및 회수 등 문화백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 황문연씨는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고 있는데, 그것이 어머니 뒷바라지 때문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CJB [테마스페셜] "여인, 걸어나오다" 동영상 촬영
ⓒ 이상기
분류와 정리 다음에 한 일이 기록이다. 기록이란 사진을 찍고 제목을 붙인 다음 폴더로 나눠 저장하는 일이다. 이 일은 문은희 화백의 예술을 역사로 만드는 일이어서 분류와 정리 못지않게 중요하다. 자료는 크게 사진과 동영상으로 나누어진다. 동영상은 20편 정도이니 분류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삶과 관련된 사진과 작품 사진은 폴더로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 삶과 관련된 사진은 아날로그 방식이어서 이것을 디지털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삶을 기록한 사진은 가족, 일상사, 작업, 전시로 나누면 된다. 예술가에게 가족과 일상사는 사적인 영역이고, 작업과 전시는 공적인 영역이다. 그러므로 작업과 전시는 작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모든 작품은 디지털 사진으로 다시 한 번 작업을 한다. 그리고 이미 팔린 작품은 과거 아날로그 사진을 스캔한다. 작품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스케치, 추상, 산수와 풍경, 감, 국화와 해바라기, 수묵 누드, 누드 병풍과 군상, 누드 콜라주, 도자기, 지공예, 시서화 폴더로 분류했다.
 40m 짜리 누드 군상
ⓒ 문은희
지금도 컴퓨터 작품 목록에 들지 못한 수묵누드가 수천 점은 된다. 이들은 크기와 장르에 따라 별도의 파일 박스에 보관되고 있다. 크기는 소품, 삼절지, 반절지, 전지로 나눈다. 장르는 감과 누드가 대부분이다. 문 화백은 감보다는 누드에 훨씬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그것은 감보다 누드 그리는 일이 훨씬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감 그림이 훨씬 어려운데, 문화백에게는 감 그림이 훨씬 단순하고 쉽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감 그림에 더 많은 창의성을 발휘해 변화를 주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문은희 화백은 감 화가, 누드 화가로 불린다. 그러나 문 화백은 자신이 누드 화가로 이룬 업적에 훨씬 더 큰 자부심을 느낀다. 그것은 누구도 하지 않은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세계 최초의 수묵 누드화가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스승인 김기창 화백으로부터 마티스보다 낫다고 인정받은 일에 감사한다.
 작품을 살펴보는 문은희 화백
ⓒ 이상기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 화백은 더 이상 수묵 누드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작업에 필요한 집중력과 체력을 되찾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더 이상 작업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문 화백도 누드 콜라주 정도 하면서 예술인생을 마감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제 작품을 제대로 정리하고 분류해준 자식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문 화백은 가끔 A4 용지로 출력된 작품 사진과 실제 작품을 대조하면서 과거를 돌아보곤 한다. 
장모님 작품은 팔지 못해도 미술운동은 잘하는 사위
 광화문 미술 행동 "벽을 넘어"
ⓒ 김진하
문은희 화백의 사위 김진하는 박근혜 정부 퇴진을 위한 촛불혁명에 '광화문 미술행동' 기획 담당으로 참여한 운동권 예술가다. 그는 2017년 4월 대표일꾼인 김준권과 함께 <광화문 미술행동 100일간의 기록>이라는 결과보고서를 냈다. '광화문 미술행동' 프로젝트는 박근혜 하야와 탄핵을 외치며 100일 동안 진행된 아트 퍼포먼스다. '벽을 넘어 Over the Wall'이라는 타이틀 아래 3개 마당으로, 15개의 주제(Slogan)로 이루어졌다. 첫째 마당이 차벽공략 프로젝트, 둘째 마당이 차벽 넘어 광장으로 프로젝트, 셋째 마당이 촛불광장 프로젝트였다.
"지난 100여 년간 근·현대 한국의 미술은 시민들과 겉 돌았다. 현대미술이나 미학이 작가 중심적이고, 또 대부분의 미술이 미술관이나 갤러리 내부에서 벌어지는 제도적인 감상·거래의 대상이라 그렇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예술이 일상공간에서 시민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획과 시도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특정한 건물이나 조형물 같은 하드웨어와 달리, 집회와 퍼포먼스 형식으로 진행되는 즉흥적 현장 중심적 예술행위야 말로 미술과 대중의 교감과 호흡을 가능하게 한다." (<광화문 미술행동 100일간의 기록> 8쪽)
 희망 촛불로 남은 광화문 광장
ⓒ 이상기
그런 의미에서 광화문 광장은 대중과 미술이 함께 끓어오른 용광로였다. 모든 장르의 예술가, 예술애호가, 일반시민이 참여하고 즐기며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한 한판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광장은 표현의 현장이 되고, 집회의 현장이 되고, 어울림의 현장이 되었다. 광장에서 미술의 폭이 넓어지고 차원이 높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것도 큰 수확이었다. 차벽을 넘으려는 민중운동이 오히려 넘기 어려운 미술의 큰 벽을 넘도록 예술운동에 자극을 주었다. 이제는 양식과 기준이라는 예술의 큰 벽을 돌파하는 일만 남았다. 그것이 미술 더 나가 예술의 살 길이다.

예술은 이처럼 벽을 넘는 작업이다. 문은희 화백도 전통 산수라는 동양화의 벽을 넘었고, 누드라는 금기를 넘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화가다. 그러나 작품은 잘 팔리지 않는다. 누드를 거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 때문이다. 김진하도 그동안 장모님의 그림을 팔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시 그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김진하는 미술운동은 잘 하지만, 화랑 경영은 잘 못하는 사위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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