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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설계론에 비친 미국..신간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입력 2017.09.13.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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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주요 정치 이벤트마다 반복되는 우리의 진보-보수 진영 간 안보·색깔 논쟁만큼이나 첨예한 사회적 논쟁이 미국에서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미국에선 생명의 기원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가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중대한 표지다.

학자들이나 관심을 가질 철학적 주제 같지만, 그로 인한 갈등은 우리 못지않게 대중적이고 감정적이며 복합적이다.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미국의 창조-진화 논쟁은 십수 년 전 미국 개신교계의 지지를 받은 일단의 학자들이 '지적설계론'(Intelligence Design)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재점화됐다.

2005년 캔자스주에선 지적설계론을 공립학교 교과과정으로 승인해 파문을 일으켰고, 그해 펜실베이니아주 연방법원은 지적설계론을 과학이론으로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신간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바다출판사 펴냄)에는 새롭게 등장한 창조론에 대한 영미 과학자들의 우려와 당혹감, 격앙된 감정까지 여과 없이 드러난다.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커, 대니얼 대닛 등 세계적 석학이자 내로라하는 진화론자인 16명의 저자는, 지적설계론이 과학이론의 외양을 갖추려 하지만 세상과 생명이 초자연적 신(神)에 의해 만들어지고 관리된다고 보는 창조론에서 신을 숨긴 창조론의 변형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지적설계론은 생물의 어떤 특징들은 자연선택으로 진화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복잡해 어떤 지적인 행위자에 의해 설계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골자다.

지지자들은 과학자들의 격앙된 반응에 기존 이론인 자연선택설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으니 이걸 함께 고민해 보자는 취지라며 자못 이성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저자들은 이런 교묘함이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선언한 미국 수정헌법 1조를 우회하려는 교묘한 책략이라고 비판한다.

사실 책의 내용은 저자들이 지적하는 이런 지적설계론의 교묘함을 걷어내는 데 들이는 노력을 빼면 해묵은 창조-진화 논쟁과 크게 다를 바 없을 듯하다.

하지만 지적설계론의 전개 과정과 이에 대한 과학자들의 대응을 쫓아가다 보면 표층과 심층이 어긋난 미국 사회의 모순을 엿볼 수 있다.

미국은 첨단 정보기술(IT) 혁명을 이끌고, 우주개발과 무기산업을 주도하는 자타 공인 세계 최강의 과학기술국이다.

그러나 미국은 유신론자가 전체 국민의 90%를 차지할 만큼 종교적 색채가 짙은 나라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넌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은 여전히 '기독교 근본주의'라 할 만큼 성경 중심의 보수적인 기독교사상의 강한 자장 안에 있다.

이런 미국이 현대 문명의 선두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종교와 과학 간의 화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신을 믿는 미국인들 가운데 절반은 성경에서 묘사하는 창조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만, 나머지 절반 정도는 '유신론적 진화론'의 관점에 서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지구와 생명의 역사에 관한 현대 과학이론을 대부분 수용하되, 그 출발과 전개 과정이 신의 섭리를 따른다고 믿는다. 로마 가톨릭과 주류 개신교도 대체로 이런 유신론적 진화론을 옹호한다.

지식인들 가운데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등장한 이신론(理神論) 신봉자도 적지 않다. 이신론은 신의 존재는 믿지만 세상사에 관여하는 인격적인 신과 초자연적 현상은 부정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이나 이신론은 과학과 차원이 다른 신학 혹은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과학과 직접 충돌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적설계론은 이와 다르다.

저자들은 과학이 완벽한 진리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과학은 초자연적 요소를 배제하고 자연적 메커니즘으로만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일관된 방법론이자, 하나의 '제도'라고 본다.

"과학은 매우 두터운 신망을 갖고 있고 영향력이 큰 제도인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 비판자들의 비판에 대응을 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거나 수정해야 하는 과학이라는 학문은 희망적 사고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다."

저자들이 지적하는 지적설계론의 문제는 과학이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과학이 아니면서 과학을 가장해 대중을 현혹하고 혼란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과학과 종교 간의 평화가 깨지고 불화가 생겨난다.

책의 편집자인 존 브록만은 이로 인해 입게 될 미국 사회의 피해를 알기 쉽게 정리한다.

"지적설계 운동은 세계를 선도하는 미국 과학을 위기에 몰아넣고, 그럼으로써 과학발전과 이에 따른 기술발전에 의해 추동되는 미국 경제에 엄청난 위협을 가하고 있다." 김명주 옮김. 336쪽. 7천500원.

abullapi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