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상대방을 몰랐거나, 나를 너무 믿었거나
그 직후 특사인 이해찬 의원 방중을 비공식 수행해 베이징에 와 별도 행동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 10년 전 참여정부 시절에도 베이징에서 북한 인사들과 접촉해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역할을 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시간을 두고 그의 행적을 체크해 보니 예상대로 북한과 접촉을 시도했다가 성과 없이 돌아갔다는 걸 알게 됐다. 어렵사리 연락이 닿은 쪽에서 만남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때 이미 중국의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은 올해 안에 핵무장을 완성하려는 목표가 분명하다. 그 전엔 일체의 대화에 나오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주류였다. 주중 북한대사관 간부와 교류가 잦은 전문가는 “완성이 코앞인데 여태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라도 지금 폐기 협상에 못 나간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니 ‘마이 웨이’를 확고히 정한 북한을 상대로 10년 전 파이프를 복원하려 해도 될 리 없고, 문 대통령이 직접 날짜까지 정해 대화하자고 했지만 우리 쪽 체면만 상하는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정부는 6차 핵실험이 터진 뒤에야 시간벌기가 안 통한다고 깨달은 듯하다. 만일 그 많다는 북한 전문가들이 김정은 신년사나 미사일 고각발사 추이를 면밀히 분석했더라면 북한의 능력이나 의도, 결심을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은 우리 정부도 아주 깜깜하진 않았다고 본다. “핵탄두 소형화를 완성하고 남은 과제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완성도 시간 문제”란 요지의 보고서가 있다는 얘기를 몇몇 당국자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벌기를 내세운 건 최상층 정책결정권자들이 그런 의견을 과소평가했거나 무시한 채 “북의 핵개발 수준이 미흡해 아직 시간이 있다”고 오판한 결과일 것이다. 거기다 과거 정부와 달리, 혹은 미국·중국과 달리 우리야말로 북한을 대화에 불러내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작용했을 수 있다. 전략의 기본이라는 지피(知彼)와 지기(知己) 중 하나, 혹은 둘 다 실패했다는 얘기다. 그 결과 정권 초기의 황금 같은 4개월을 허송하고 말았다. 그냥 흘려보낸 게 아니라 한·미 관계와 한·중 관계, 그리고 한반도 정세에 남긴 후유증이 너무나 크다.
예영준 베이징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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