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추적>최영미 시인의 '뉴욕발 파커미담', 한국에선 왜 안먹히나

한경진 기자 2017. 9. 1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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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유명한 스타시인 최영미(56)씨가 어제(10일) 페이스북에 ‘특급호텔 투숙 협찬 요구’ 게시글을 올렸다가 네티즌들에게 이틀째 뭇매를 맞고 있다.

최씨는 서울 홍대입구역에서 500여m 떨어져 있는 4성(星)급 ‘아만티호텔’이 마음에 든다며, 자신에게 1년 간 방 하나를 (숙박비 없이) 제공해준다면 “홍보를 끝내주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호텔 홈페이지에 따르면 ‘로얄 스위트 룸’은 1박에 50만원, ‘스탠다드 룸’은 25만원이다. 현재 유명 아이돌 그룹 ‘인피니트’가 광고 모델로 활동하며 홍보를 ‘끝내주게’ 하고 있다.

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아만티호텔.

최씨는 문화 예술인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처럼, 아만티호텔 측에 순수한 ‘메세나’ 활동 차원에서 호텔방 지원을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실제로 게시글에서 미국 여류 시인 ‘도로시 파커’ 사례를 언급하며, 아만티호텔에서 시 낭송도 하고 각종 문화 활동을 펼치겠다고 했다.

최영미 시인 페이스북

도로시 파커가 머물렀던 뉴욕 알곤킨 호텔은

최씨가 언급한 도로시 파커(1893~1967)는 1920년대 미국 문인들의 사교 모임을 주도한 ‘여걸’로, 알곤킨(Algonquin) 호텔을 역사적 명소로 만든 인물이다. ‘베네티 페어’ 기자였던 그녀는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이 모르핀에 중독되자, 1919년 뉴욕 맨해튼 알곤킨 호텔로 거처를 옮겼다.

곧 그녀를 중심으로 시인, 극작가, 평론가, 감독, PD, 출판·언론인, 배우들이 몰려들었고, 호텔 측이 커다란 원탁이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이 때부터 10년 간 문학·출판·공연·영화계 인사들이 매일 알곤킨 호텔에 모여 점심과 술을 함께 즐겼다. 당대 예술·문학을 조롱하는 모임인 이른바 ‘악순환(Vicious Circle)’ 클럽을 운영했다. ‘악순환’의 원년 멤버 헤롤드 로스는 1925년 잡지 ‘뉴요커’를 창간했다. 이 잡지가 뉴욕 진보적 지식인의 상징이 된 데는 이 모임 인맥의 도움이 컸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알곤킨 호텔.

지금도 알곤킨 호텔 홈페이지에는 도로시 파커를 포함한 라운드 테이블 창립 회원 10명의 얘기가 소개돼있다. 알곤킨 호텔에서는 도로시 파커와 작가 로버트 벤칠리, 극작가 조지 카우프만 등 ‘악순환’ 멤버가 즐겨 마시던 레시피로 만든 칵테일(마티니)도 판다.

알곤킨 호텔 홈페이지

‘시인 갑질’?…쏟아지는 비난에 당혹스러운 최 시인

문제는 1920년대 뉴욕발(發) ‘파커 미담(美談)’이 2017년 서울에서 쉽게 먹혀들지 않았다는데 있다. 서울이 뉴욕이 아니듯, 최영미는 도로시 파커가 아니었다. 인터넷 강국인 대한민국은 소셜미디어에서 위세를 활용해 남의 영업장에 홍보 대가로 무리한 협찬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파워블로거지’ ‘파워브로커’)이 따로 나오는 나라다.

두 여류시인. 최영미(왼쪽)와 도로시 파커.

이 때문에 최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제안’을 불쾌히 여기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1980년대 학생 운동권의 순수성과 정열에 과감한 비판과 도발을 던지며, 처절하고 뜨거운 언어로 한국 문단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시인도 결국은 ‘땡긴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최영미 시인은 ‘홍보’의 방식으로 ‘시인이 주도하는 시 낭송회’를 생각한 것 같지만, 대중들은 그것을 ‘땡김의 다른 표현’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의도치 않은 ‘악플’ 세례를 된통 받고 있는 최 시인은 하루 동안 해명 게시글도 여러차례 올렸다. “도로시 파커 생애가 생각나 제안한 것” “거래를 제안한 것이지 공짜로 방을 달라고 압력을 행사한게 아니다” “이게 뭐 대단한 기사거리인가, 계속 글이 쏟아진다. 오해다” “글을 올릴 때는 약간의 농담도 있는데…한국 사람은 울 줄은 아는데 웃을 줄은 모른다”.

최영미 시인 페이스북

‘클럽’으로 유명한 홍대 거리 한복판에서, K팝 아이돌을 광고 모델로 내세우며 2030 투숙객을 ‘타깃 소비자층’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아만티호텔이 시 낭송회를 열어주겠다는 ‘386 문인’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호텔 측에선 아직 뚜렷한 입장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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