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심층기획] 블라인드 채용 맞춤 스펙 '올인'..머리 싸맨 취준생

김범수 2017. 9. 10.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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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채용 과정.. 캄캄한 '취업 바늘구멍 뚫기'/기업 눈길 사로잡기 위해 고군분투/ 불안감에 블라인드 대비 학원 '노크'/"과도한 스펙 쌓기 경쟁 우려" 지적도

최근 취업준비생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블라인드 채용이다. 직무 수행과 별 상관없는 학벌, 지연, 나이 등이 취업 여부에 미치는 영향을 배제하겠다는 취지의 제도라 공정한 기회의 확대로 이어질 것이란 기대가 커서다. 그러나 자신을 차별화하고 직무와 관련된 능력을 보여줄 스펙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어 불안감을 느끼는 취준생들도 적지 않다.

달라진 채용 과정에 대응하고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취준생들은 사설 학원의 문을 두드리고 독특한 스펙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 같은 양상이 자칫 과도한 스펙 쌓기 경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어떤 스펙을 쌓아야 할지…”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는 기업들이 늘면서 취준생들은 이색적인 스펙, 경험을 찾아나서고 있다. 지금까지 자기소개서의 단골 소재였던 동아리·봉사활동, 배낭여행 등은 이미 낡은 것이 돼 버렸다.

취준생 서모(28)씨는 최근 펜싱 클럽에 등록했다. 서씨는 “펜싱은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스포츠이기도 하고 독특한 경험을 지니면 구직에도 좋을 것 같아서였다”고 말했다. 승마를 배우는 취준생들도 늘었다. 경기도에 위치한 한 승마클럽 관계자는 “그간에는 이제 막 승마를 시작하는 10대들이 많이 찾았는데, 올해부터 취업준비를 위해 배우러 왔다는 20대가 늘기 시작했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블라인드 채용으로 필기시험의 중요도가 높아지면서 취준생들은 공기업 입사 과정에서 필요한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이나 사기업 적성검사에 ‘올인’하기도 한다.

10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해 1∼8월 NCS 관련 도서 판매량은 8만4615권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49.4%(2만7965권)나 증가했다. 삼성그룹 적성검사 등 대기업 적성검사 도서 판매량도 전년 대비 1만권 이상 늘어난 6만7264권이 팔렸다.
◆불안감 파고든 사교육 난립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학원가에서는 ‘블라인드 면접 대비’를 내세운 다양한 강좌가 개설되고 있다. 서류전형, 필기시험까지 통과하고 마지막 관문인 면접을 앞둔 취업준비생들의 초조함, 불안감을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수강을 한 취준생들 사이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지난달 면접 학원에 다녔던 A(26·여)씨는 “기존의 발성 연습이나 자기소개 방법 같은 스피치 강의와 다를 게 없었다.”며 “불안하니 어쩔 수 없이 등록했지만 돈만 날린 기분”이라고 하소연했다. B(28)씨 역시 “꼬드김에 넘어가 75만원을 내고 3주 과정에 등록했는데 첫 수업 내내 발성 연습만 했다”고 아쉬워했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면접 때 말만 잘하거나 태도가 좋다고 채용되는 경우는 없다”며 불필요한 준비라고 잘라 말했다.
정부가 공개한 출신지역과 학력 등의 기재란이 빠진 공공기관 입사지원서 예시안.
세종=연합뉴스

◆“학력은 스펙 아닌가요?” 역차별 주장도

불합리한 차별을 최소화하겠다는 블라인드 채용이 역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만도 터져나온다. 논란의 핵심은 학벌이다. 블라인드 채용의 기본 취지는 ‘명문대’ 학벌이 취업의 주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을 배척하는 것이다.

하지만 외모나 출신지역, 친·인척 관계 등 자신의 의지나 노력과 상관없이 ‘타고난 것’이 취업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차별이지만 노력으로 성취한 학력을 차별의 포인트로만 두는 것은 또한 역차별이라는 시각도 없지 않아서다.

주요 사립대에 다니고 있는 김모(26)씨는 “중·고등학교 때 남들보다 더 노력해 대학에 들어간 것을 스펙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출신 학교로 모든 것을 평가하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학력을 아예 배제하는 것 또한 모순”이라고 핏대를 세웠다. 또 취준생들은 블라인드 채용 방식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학점·어학능력 등 기본적인 취업 준비를 하기 힘들다고 말하기도 한다. 블라인드 채용이 취준생에게 이중고로 다가올 수 있다는 우려다.

이런 태도는 블라인드 채용의 안착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어진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취준생 36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48%가 ‘블라인드 채용 방식이 안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76%는 블라인드 채용 적용 여부와 상관없이 기존에 하던 취업준비를 계속할 것이라고 답했고 그렇게 하는 이유로는 ‘어차피 기본 스펙은 갖춰야 할 것 같아서(39%)’를 꼽았다.

정부 내에서도 이런 불만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달 29일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과 관련해 “충분한 예고 없이 블라인드 채용 절차를 진행해 그간에 스펙을 쌓으려고 고생했던 사람들이 역차별받는다고 하소연하고 있다”며 “피해가 없도록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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