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는 어쩌다 복지부에게 의문의 1패를 당했나
이제 시작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법조기자인 나의 스토리이기도 하다. 광복 70년이던 2015년 보도한 재일동포 문제가 헌법소원으로 이어지면서 뜻하지 않게 오랫동안 한 사건을 관찰했다. 10년 넘게 헌법재판소에 출입하며 기사를 써왔지만 어떻게 사건이 시작해서 진행되고 끝나는지 처음 알았다. 돌이켜 보니 기자인 나는 헌재 안에서만 사건을 보아왔다. 담장 밖에서 올려다본 사법기관은 낯설고 차가왔다. 2017년 가을, 헌법재판소에 관한 무심한 스케치이다.
나는 2009년 <헌법재판소, 한국현대사를 말하다>라는 논픽션을 냈다. 당시 다니던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전업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이 책을 쓰면서는 전·현직 헌법재판관과 관련자들을 143회 접촉해 100시간 넘게 인터뷰했다. 가령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을 취재하면서는 문재인 변호사를 4시간40분 동안 만났다. 헌재는 나의 테마가 됐다. 책이 나오고 서울대 정종섭 교수가 강의 부교재로 채택했고, 이를 계기로 최고재판소 재판관의 추천을 받아 일본에서 번역·출판됐다.
■“일본 특별영주권 포기해야 보육료 지급” 이 책을 번역한 사람들이 자이니치(在日·재일) 변호사들이다. 자이니치는 일본제국의 식민지배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남겨진 조선인과 그 후손을 가리킨다. 이들과 교류하면서 나는 자이니치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집을 빌리지도 못했고, 취직할 수도, 공무원이 될 수도 없었다. 생존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야 했고, 가짜 일본이름을 썼고 우리말은 못하게 됐다. 광복 70주년인 2015년 발표한 <일본제국 vs. 자이니치>는 이들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자이니치도 나의 테마가 됐다.
이 무렵, 한국에 시집와 살고 있는 자이니치 여성들에게서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를 들었다. 다문화가정에도 주어지는 보육료를 자신들의 아이만 받지 못한다고 했다. 이 여성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국적이 한국이고 남편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이다. 즉,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데도 아이들에게 보육료 혜택이 없었다. 오히려 외국인 결혼이민자의 자녀들은 다문화가족지원법에 따라 보육료를 받고 있었다. 난민도 예외적으로 보육료 혜택이 있었다.
확인해보니 정부는 자이니치 엄마들이 일본 특별영주권을 포기해야만 보육료를 주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특별영주권은 눈물과 투쟁의 결과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은 자이니치들의 일본 국적을 강제로 박탈하면서 기본권도 모두 빼앗았다. 식민지 출신자에게 국적 선택의 기회를 줬던 독일·프랑스와 달랐다. 자이니치들은 추방의 불안에서만이라도 벗어나야겠다며 영주권 투쟁을 벌였다. 길고 긴 투쟁 끝에 1991년에야 받아낸 것이 각종 제한이 붙은 이 특별영주권이다.
이들에게 일본은 할아버지·할머니 때부터 살아온 고향이다. 친정도 친구도 추억도 모두 바다 건너에 있다. 만에 하나 이혼이라도 하면 돌아갈 곳도 일본뿐이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정부는 보육료를 원하면 특별영주권을 버리라고 했다. 지원받는 보육료는 만 0세는 매월 40만6000원, 만 1세 35만7000원, 만 2세 28만5000원, 만 3세부터 22만원이다. 다문화가정의 경우 22만원에서 59만1000원까지다. 나는 이런 내용을 모아 2015년 9월 <주간경향>에 소개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취재해온 민형기 전 헌법재판관을 만났다. 2012년 퇴임하고 법무법인 로고스의 고문으로 있었다. 그는 기사를 보고 아이들 걱정부터 했다. “아이들이 다 안다. 나이가 어려도 듣고 보고 알게 된다. 그리고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생각할 것이다. 똑같은 한국인인데 왜 나만 보육료를 주지 않아 부모가 늘 힘들어 했나. 이중국적인 다문화가정의 친구도 키워주는 국가가 왜 나만 버려두었냐고, 마음에 응어리가 질 수도 있다.” 그는 공익소송에 나서겠다고 했다.
2015년 11월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청구인이라는 낯선 이름을 갖게 된 김명향씨(35)는 말했다. “부모와 형제가 모두 일본에 있다. 나 혼자 한국에 시집왔다. 특별영주권은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가 고통 속에 싸워 얻은 것이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하필 아이 보육료를 가지고 이걸 포기하라고 하는 건가. 고향땅인 한국에 와서 내 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며 상징적인 액수의 수임료도 냈다.
■‘180일 이내 선고’ 세 번이나 어긴 셈 이들이 보육료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보건복지부 지침인 보육사업안내 부록 2에 있다. ‘보육료·양육수당 지원자격이 없는 자’에서 ‘주민등록법에 따라 재외국민으로 등록·관리되는 자’라고 정해놨다. 재외국민은 외국의 영주권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민형기 전 재판관은 “헌법이 보장한 평등권,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 재산권, 부모의 자녀 양육권, 혼인과 가족생활의 보장, 모성보호와 건강권을 모두 침해한다”고 했다. 그리고 “특히 보육료 거절 근거가 법률도 아닌 지침에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위헌”이라고 했다.
소송이 시작되자 한국과 일본에서 응원이 잇따랐다.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 <그라운드의 이방인> 등으로 유명한 김명준 감독, 영화배우 권해효씨 등이 사람들을 모아 탄원서를 냈다. 자이니치 변호사 모임인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 가장 큰 재일동포 단체인 재일대한민국민단이 의견서를 냈다. 정치학자인 김웅기 홍익대 교수도 의견을 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보육료 차별 사건을 지원했다. 여러 언론에서 소송을 제기한 김명향, 김여순(38)씨를 인터뷰했다.
이렇게 <주간경향>의 보도 이후 헌법소원이 제기되는 사이, 국가인권위원회가 재외국민에게 보육료를 주라고 했다. 인권위는 “국내에 거주하는 재외국민 유아를 달리 대우해야 할 법적 혹은 제도적 근거나 필요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국내에 거주하는 재외국민 유아를 보육료와 유아 학비의 지원대상에서 제외함은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행위”라고 그해 10월 밝혔다. 국제규약인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도 위반된다고 했다.
하지만 헌재는 이 사건을 2년이 되도록 쥐고만 있었다. ‘사건을 접수한 날부터 180일 이내에 종국결정의 선고를 하여야 한다’는 헌법재판소법 38조를 세 번이나 어긴 셈이었다. 그러는 사이 2012년생들인 두 사람의 막내들도 만 5세가 되면서, 보육료를 받을 기간이 1년도 채 안 남게 됐다. 헌법소원 제기 당시 아이들이 크고 있으니 임시처분부터 해달라고 가처분까지 냈는데, 헌재는 2년이 되도록 본안도 선고하지 않았다. 재판관 출신인 민형기 변호사조차 “재판관들이 간단한 사건을 너무 오래 들고 있다”고 했다.
그러던 지난 1일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헌법소송의 상대방인 보건복지부와 교육부가 재외국민에게도 보육료를 차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국내에서 어린이집 또는 유치원을 다니는 재외국민 아동에게 9월부터 보육료·유아 학비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가인권위원회 등의 3~5세 누리과정 지원 권고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헌재가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없게 됐다. 이제 헌재가 이 사건을 정리할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보육료가 어쨌든 잘 해결됐다면서 사건을 각하하는 것이다. 각하는 헌재가 판단할 실익이 없다는 뜻이다. 둘째는 재외국민에 대한 보육료 차별이 위헌인지 아닌지 밝히는 것이다. 이는 당장은 사건이 해결됐지만 헌법의 지향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둘째 방법을 법률가들은 ‘헌법적 해명’이라고 한다. 헌법재판소는 1988년 개소 이후 수많은 사건에서 헌법적 해명을 해왔다. 가령 2000년 6월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됐던 송모씨는 화장실에 칸막이가 엉성해 인격권이 침해됐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당시 송씨는 유치장에서 나온 상태여서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다. 그렇지만 헌재는 인격권 침해라며 위헌을 선고했다. 시민에게 보장되는 인격권이 무엇인지 밝히는 ‘헌법적 해명’을 위해서였다.
■민형기 전 재판관도 헌재에 쓴소리 민형기 전 재판관은 헌재가 위헌 여부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은 문재인 정부로 바뀌면서 보육료를 주겠다고 했지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실제로 지난해 8월까지만 해도 정부는 인권위 권고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보건복지부는 “국내 영주 의사가 불분명한 재외국민까지 지급하는 것에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번 사건을 각하하는 것은 헌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법조계는 지적한다. “보육료 차별 헌법소원은 언론, 시민단체, 변호사단체, 재외동포, 국가기관이 나선 일이다. 그런데도 헌재는 시간만 보냈고 그 사이 소송 상대인 정부가 해결했다. 헌재가 헌법적 해명 없이 사건을 각하한다면 보건복지부의 해결을 기다렸다는 말밖에 안 된다.” 따라서 헌재가 이제라도 제대로 결론을 내놓는 게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민형기 전 재판관도 “헌법소원 청구서에서 그동안 받지 못한 보육료도 따져 물었으므로, 헌재는 보육료 소급분에 대해 판단할 의무가 있다”고 설명했다. 친정인 헌재에 작심하고 쓴소리도 했다. “정치세력이 관여된 문제들은 보란 듯이 적절한 시기에 결론을 내면서, 시민의 기본권이 달린 문제에는 이렇게 한다. 헌재가 헌법재판의 본질적 기능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청구인 김여순씨는 헌재가 결론을 내줄 것으로 기대했다. “평범한 주부인 내가 생각지도 못한 헌법소송에까지 나선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내 가족의 아픈 역사와 내 아이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대로 듣기 위해서다. 보건복지부의 결정은 고맙지만 우리 애는 보육료 받을 기간이 몇 달 되지도 않는다. 한국 사회를 발전시켜왔다는 헌재가 우리들의 사건도 제대로 판단해주기를 부탁드린다.”
헌법재판소는 이번달 정기선고를 오는 28일에 한다. 재외국민 보육료 차별 헌법소원도 이날은 결론이 난다. 지난 2년간 나 자신 이 사건에 몰입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청구인도 대리인도 아니다. 재외국민을 보육료로 차별하는 것은 부당하다 싶어 기사화는 했어도, 위헌인지 합헌인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렇지만 신뢰도 1위 국가기관이라 불리는 헌재가 시민의 고통과 눈물에 둔감하다는 것만은 알게 되었고, 이렇게 기록으로 남긴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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