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잡종이 뭐 어때서..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2017. 9.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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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종, 진화의 계보를 다시 쓰다
사자 등 표범科 다섯 동물 1만3000여 개 유전자 공유.. 거미줄 같은 생물 진화로 새로운 種 유입도

지구온난화가 북극곰의 정체성마저 위협하고 있다. 극지방의 얼음 장벽이 녹아 사라지면서 불곰이 서식지를 북쪽으로 확장하고 있다. 두 곰의 영역이 겹치면서 불곰(grizzly)과 북극곰(polar bear) 사이에 태어난 잡종(雜種)인 피즐리(pizzly)가 늘고 있다. 얼음이 사라지면 순백의 북극곰은 사라지고 카푸치노 커피색의 피즐리만 남을지 모른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유전자 분석을 통해 잡종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 잘못됐음을 밝혀내고 있다. 잡종은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 아니라 동식물이 환경변화에 적응해 살아남는 데 필수적인 존재로 재평가되고 있다.

◇북극곰 DNA에 나타난 말레이곰의 유전자

지난 4월 독일 젠켄베르크 자연사박물관 연구소는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곰 4종의 유전자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잡종은 북극곰과 불곰 사이에만 있지 않았다. 놀랍게도 북극곰에서 말레이곰의 흔적이 발견됐다. 두 곰은 각각 북극과 동남아시아에 살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다. 연구진은 '중간 숙주' 또는 '매개 종'이라는 개념으로 이런 모순을 설명했다. 불곰의 서식지는 북극곰, 말레이곰과 겹친다. 젠켄베르크 연구소의 악셀 얀크 교수는 "불곰과의 교배를 통해 북극곰의 유전자가 아시아의 다른 곰들에게도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2006년 자연에서 피즐리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물원에서만 종이 다른 곰끼리 짝짓기가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2006년 이후에는 온난화 때문에 일어난 이상 행동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독일 연구진은 곰들의 이종교배(異種交配)가 수만년 전부터 일어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종교배는 생물학의 기본적인 종(種) 개념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1942년 진화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는 '종은 실제 또는 잠재적으로 상호 교배하는 자연집단을 이르며 다른 집단과는 생식적으로 격리돼 있다'라고 정의했다. 즉 서로 다른 종은 짝짓기를 해도 새끼를 낳지 못하거나 아니면 잡종이 태어나도 후손을 만들지 못한다는 뜻이다. 암말과 수탕나귀 사이에 태어난 노새가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자연에서 태어난 잡종들은 후손을 낳고, 새로운 종으로도 발전하는 것으로 관측됐다. 지금까지 순종으로 생각했던 생물이 사실은 잡종인 경우도 허다했다.

미국 텍사스A&N대 연구진은 지난 7월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대형 고양잇과 동물 5종의 유전자 진화 과정을 발표했다. 호랑이와 사자, 표범, 눈표범, 재구어 등 표범과(科) 다섯 동물은 1만3000개 이상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동물들은 460만년 전 공통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잡종을 통해 서로 유전자를 주고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재규어는 시신경 관련 유전자 2개를 사자 유전자로 바꾸기도 했다.

그래픽=김충민 기자

◇식물에서 나비, 도롱뇽까지 잡종 천국

잡종이 도태 대상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1930년대 식물학자들이 먼저 눈치챘다. 당시 영국에서 꽃 피는 식물을 조사한 결과, 25%에서 이종교배가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동물에서 이종교배가 일반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마이어의 종 개념이 워낙 강력한 규범이었기 때문이다.

동물 역시 잡종 천국이었다. 2012년 하버드대의 제임스 말레 교수는 표범나비에서 한 종의 유전자가 40%까지 다른 종으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천적이 두려워하는 독나비가 있다면 그 무늬를 만드는 유전자를 공유하는 식이었다.

잡종은 신종으로 이어졌다. 잡종이 원래의 부모 종과 교배를 하면 부모 종으로 새로운 유전자가 유입된다. 이른바 '잡종이입(introgressive hybridization)' 현상이 거듭되면 결국 새로운 종이 나타났다. 미국 조지아대의 마이클 아널드 교수는 "생물의 진화는 나뭇가지처럼 단선적으로 갈라지는 형태가 아니라 아래위, 좌우로 서로 연결되는 거미줄과 같다"고 설명했다.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진화의 산실

그렇다면 잡종도 보호해야 할까. 과학자들은 인위적으로 도입된 잡종은 통제해야 한다고 본다. 1950년대 낚시 미끼로 도입한 줄무늬 도롱뇽은 원래 있던 종과 잡종을 만들었고, 결국 다른 종을 모두 멸종위기로 내몰았다. 반면 자연적으로 생겨난 잡종이라면 환경변화에 적응하는 새로운 종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생물 진화를 이끄는 새로운 힘이란 것이다.

이 점에서 미국의 붉은늑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7월 UCLA의 로버트 웨인 교수는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미국 남동부 지역에 사는 붉은늑대와 캐나다 퀘백 지역에 사는 동부늑대가 북미 대륙 전 지역에 살던 회색늑대와 동부로 서식지를 넓힌 코요테의 잡종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미국 멸종위기보호법은 순종만 대상으로 한다. 그동안의 복원 노력으로 이제 어느 정도 개체 수를 갖춘 붉은늑대가 다시 법의 보호망 밖으로 내몰릴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하버드대의 말레 교수는 "잡종이 자연적인 현상이고 진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만큼 붉은늑대를 법의 보호에서 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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