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무릎 꿇은 엄마 "간절함만 전해진다면 지금도 뭐든 하겠다"

이태윤 2017. 9. 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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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 특수학교 신설 토론회 영상 번져
'반대' 주민 앞에 장애인 엄마 '무릎' 호소
자기 자녀 이미 커 신설되도 학교 못 다녀
장애인 부모들 "영상 보고 피 거꾸로 솟았다"
소셜미디어에선 학교 신설 지지 서명 이어져

최근 15년간 서울선 공립 신설학교 한 곳도 못 생겨
서초구, 중랑구서도 반대 거세 학교 신설 추진 난항
“시간은 흐르는데 토론회는 조금도 진전이 없었어요. 간절한 마음을 최대한 사정해 보고 싶었어요. 저희가 뭘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간절함만 전할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어요. 그때 '무릎이라도 꿇자' 생각했어요."
지난 5일 서울 강서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열린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신설 2차 주민 토론회'에서 장애 학생 어머니 장민희씨가 지역주민 앞에 무릎을 꿇고 호소하고 있다. [중앙포토]
8일 장민희(46·여)씨는 사흘 전인 지난 5일 상황을 중앙일보에 이렇게 설명했다. 장씨는 최근 널리 퍼진 '무릎 영상' 속 주인공이다.

지난 5일 서울 강서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열린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신설 2차 주민 토론회’에서 장씨는 지역주민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학교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장씨가 무릎을 꿇자 “쇼하지 마라”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등등 야유가 나왔다.

이 장면은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이 겪는 난항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서울시교육청은 강서구 가양동 옛 공진초등학교 부지에 지적장애인 140명이 다닐 수 있는 특수학교 설립을 2013년 이후 추진해왔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은 "이 자리에 한방병원이 들어와야 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주민 항의로 지난 7월 6일 1차 토론회가 무산됐다. 두 달 만에 열린 이날 2차 토론회에서도 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고성이 쏟아졌다.

장씨는 장애인 가족을 위한 비영리 단체인 '강서장애인 가족지원센터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다. 장씨 딸은 지적장애 1급이다. 딸은 지난 2월 일반고를 졸업해 발달장애인을 위한 직업재활센터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공진초 부지에 특수학교가 생긴다고 해서 장씨 딸이 이 학교에 다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장씨가 무릎을 꿇자 다른 엄마들도 잇따라 무릎을 꿇었다.

"저희에게 욕을 하면 욕을 듣고, 저희를 때리면 맞을 수 있어요. 저도, 다른 엄마도 사전에 짠 게 아니에요. 나중에 물어보니 제가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옆에 있어줘야겠다는 마음이 드셨대요.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장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영상을 접한 장애인 가족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발달 장애 아들을 둔 엄마 이수연(47)씨는 이 중 하나다. 이씨의 아들은 구로구에 있는 특수학교인 정진학교로 매일 2시간씩 통학하고 있다. 이씨는 이날 아들을 맡길 데가 없어 토론회에 오지 못했다. 장씨가 무릎을 꿇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봤다.

“영상을 처음 봤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어요. 이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인가 싶어서요."이씨는 "그렇지만 우리 엄마들 모두 지역주민의 미움을 사는 것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고 했다. "학교가 생기면 우리 애들이 여기를 다녀야 하잖아요. 학교가 지역 주민들의 미움을 사면 아이가 학교에 다니는 내내 눈총을 받게 되잖아요."

이날 무릎을 꿇은 엄마 중 다수는 자녀가 이미 고학년이어서 나중에 학교가 생겨도 이곳에 자녀를 보낼 처지가 아니었다. 이런 행동에 대해 이씨는 "학교가 생기면 아이를 보낼 엄마들 마음을 생각해 무릎까지 꿇고 주민들에게 호소한 것 같다”고 말했다.

'무릎' 영상이 유튜브 등을 통해 퍼지자 지난 7일 장애인 부모들을 지지하는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강서구 특수학교 신설을 위한 서명에 나서 주십시오'란 제목으로 페이스북·트위터 등에서 확산 중이다. 이씨는 “서명 운동이 번진다는 소식에 장애인 엄마들끼리 ‘이번에는 정말 지을 수 있는 거냐’는 기대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신설 추진 중인 서진학교는.
하지만 이들 소망대로 학교가 지어질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지난 7월 취임 3주년 기자 간담회에서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고 있는 장애인의 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난관을 거치더라도 책무를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거세다. 지역주민들은 “강서구는 허준 거리, 허준 박물관이 있는 곳”이라며 “효율성을 살려 국립한방병원을 지어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불을 붙인 이가 이 지역 국회의원인 김성태(자유한국당) 의원이다. 그는 지난해 총선 때 "강서구에 국립한방병원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이에 대해 백종대 서울시교육청 교육행정국장은 “강서구에 국립한방병원 짓는 문제는 복지부에서 예비타당성 조사도 진행된 적이 없다. 공진초 부지는 학교 용지여서 도시 계획 시설 결정을 바꾸지 않는 한 국립한방병원은 지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서울에는 지난 15년간 주민 반대 등의 이유로 공립 특수 학교가 단 한 곳도 신설되지 못했다. 서초구 옛 언남초 부지에 지어질 계획인 ‘나래학교’, 중랑구에 설립 예정인 ‘동진학교’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지난 6월 열린 나래학교 주민설명회도 주민 반대로 무산됐다. 동진학교는 5년이 지나도록 부지 선정조차 못 했다.

지난 1일 서울 강북구에 효정학교가 세워졌으나 이는 사립 특수학교다. 공립 특수학교는 지난 2002년 종로구에 세워진 경운학교가 가장 최근이다.
서울지역 특수학교 갈등
특수학교 설립을 위해선 지역주민을 설득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찾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일부 주민이 지역 이미지 하락 등을 우려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특수학교가 들어오면서 동시에 공원, 주민 편의시설이 늘어나면 오히려 지역 이미지가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현재 서울에서 특수교육이 필요한 장애학생은 1만2929명이다. 이중 특수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4496명(34.7%)뿐이다. 그마저도 먼 통학거리에 고통을 겪는다. 조 교육감은 최근 토론회에서 “강서구에 사는 장애인 학생 200여 명 중 120명은 통학하는 데만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이태윤 기자 lee.tae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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