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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 “사교육 시장에 몸 담은 인생을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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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9-08 14:40:21 수정 : 2017-09-08 15:4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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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 300억원 출연해 청년 창업 지원하는 ‘윤민창의투자재단’ 설립 / “사회에 진 빚을 갚고 싶다는 생각에 재단 만들어” “장학사업도 펼칠 것”
메가스터디 손주은회장. 남제현기자
한국 사회에서 사교육은 ‘필요악’ 정도로 여겨진다. 공교육만으로 높은 수준의 교육열을 채울 수 없는 상황이지만, 국민 대부분이 사교육비 부담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사교육 관계자들의 위상도 양면성을 갖는다. 자녀의 입시 상담 등 필요할 땐 가장 먼저 찾는 대상이면서도 평소에는 멸시의 눈초리를 받는 존재로 전락한다.

대부분 사교육업자들은 이런 위상이 불만스러울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사교육의 대부’로 불리는 손주은(56) 메가스터디그룹 회장은 “사교육 시장에 몸담은 인생을 후회한다”고 고백했다. 월 수억 원을 벌어들이던 스타 강사 출신으로 인터넷강의 시장의 문을 활짝 열며 큰 부를 쌓은 교육사업가가 왜 후회한다고 했을까?

최근 서울 서초구 메가스터디교육 본사 회장실에서 만난 손 회장은 “사교육 관계자들은 모두 후회하고 있을 것”이라며 “사교육이라는 게 사회 문제를 개선하는 게 아니라 불평등을 심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교육은 본질적으로 고도압축성장기의 부산물”이라며 “그 시기에 잘 편승해 너무 쉽게 성공했고, 부를 얻었다”고도 털어놨다.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이 “도전해라, 한 번의 도전이 인생을 어떻게 바꿀 줄 모른다, 나는 커피를 팔려다 과외를 하고 교육사업에까지 뛰어들게 됐다’며 극심한 청년실업난으로 실의에 빠진 청년들에게 ‘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남재현 기자

손 회장의 이 같은 고백은 유년시절부터 형성된 삶의 철학에서 비롯됐다. 1961년 경남 창원시(당시 창원군)에서 태어난 손 회장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손 회장은 “외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던 목사였다”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주일인 일요일에는 공부를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온 집안이 독실했다”고 말했다.

엄격한 기독교 윤리에 따라 생활하다보니 손 회장은 또래 아이들에 비해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사유를 많이 하게 됐다. 회개기도를 자주하면서 반성과 성찰이 생활습관처럼 굳어지기도 했다.

그는 예화를 하나 들었다. 손 회장이 초등학생일 때 집 근처 오일장에 10원을 내면 떡볶이 떡을 10개 먹을 수 있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당시 아이들은 주인 할머니 몰래 11개나 12개씩 떡볶이 떡을 집어먹곤 했는데, 손 회장도 하루는 그렇게 해 봤단다. 이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그는 고교 2학년 때 결국 할머니를 찾아가 값을 치렀다.

손 회장의 어린시절 또 다른 특징은 어떤 놀이에 빠지면 아주 몰두했다는 점이다. 축구를 좋아했던 손 회장은 축구를 시작했다하면 2시간을 훌쩍 넘겼다. 한 번은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쯤까지 14시간 넘게 공을 찬 적도 있다고 한다. 가죽으로 된 공이 흔치 않던 시절, 손 회장은 자신이 오래 차서 터뜨린 공이 30개 이상이라며 웃어보였다.

그 시절 유행했던 구슬치기에도 푹 빠졌다. 구슬치기를 할 때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업 수완을 발휘한 일화가 있다. 손 회장이 초등 5학년일 당시 모은 구슬이 약 1000개로 동네 같은 학년 아이들 중 가장 많았는데, 비슷한 구슬을 보유한 6학년 형과 대결하지 않고 한 편이 되기로 했다. 그 형과 붙으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지만 같은 편이 되면 나중에 구슬을 모두 물려받을 수 있을 거란 계산에서였다.

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해서 손 회장이 공부를 못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성적이 워낙 좋아 초등 2학년 때 한 학년을 월반하기도 했다.

손 회장은 “시골 마을에서 내가 지나갈 때면 사람들이 ‘쟤가 월반한 애다’라고 말하곤 했다”며 “그게 공부에 대한 압박감으로 느껴지는 동시에 최고가 돼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해 준 것 같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중·고교를 졸업한 손 회장은 재수 끝에 한국외국어대 영어과에 입학했다. 이후 다시 입시를 치러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들어갔다. 손 회장이 대학에 재학할 당시는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과 반복된 휴교 등으로 혼란스러울 때였다.

손 회장은 대학 재학 중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했다. 학생 부부였지만 부모님이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줘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진 않았다. 그렇다고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하루는 말수가 별로 없는 아내가 돈이 다 떨어져간다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고향에서 돈을 보내주기까진 보름 정도 남아 있었다.

밤새 고민한 끝에 손 회장은 서울대 졸업식에서 커피를 팔아 돈을 벌기로 했다. 추운 날씨에 따뜻한 커피 장사를 하면 짧은 시간에 큰 돈을 벌 수 있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손 회장은 남동생과 동생 친구를 불러 커피믹스와 보온병 10개, 종이컵 등을 싸들고 학교에 올라갔다.

그러나 졸업식장에는 이미 커피행상 수십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동생은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망연자실하던 손 회장에게 묘안이 떠올랐다. 한 자리에서 커피를 파는 행상과 달리 돌아다니며 커피를 팔기로 한 것이다. 이날 손 회장 일행은 졸업식장을 돌아다니며 2시간만에 커피를 모두 팔아 당시로서는 ‘거금’인 15만 원을 벌었다. 손 회장은 지금도 자신의 첫 사업은 학원이 아닌 커피장사라고 소개한다.

계속 연락을 주고받던 전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는 이 얘기를 전해 듣고 손 회장을 야단치며 강남 고액과외를 소개해줬다. 손 회장이 반에서 20등 하던 아이를 5개월 만에 전교 15등까지 끌어올리자 입소문을 타고 과외생들이 늘어갔다. 손 회장은 2년간 약 2억 원이라는 큰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이 갖춰지자 손 회장은 사법고시에 뛰어들었다. 그는 “아버지가 내가 과외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던 데다 평소 판사나 검사가 됐으면 하셨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손 회장은 사법고시 관련 서적을 펼쳐본 뒤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꿈은 그렇게 일주일만에 깨졌다.

손 회장이 사법고시 1차 시험을 치른 다음날, 자녀를 과외시킨 학부모들이 집앞에 찾아왔다. 학부모들은 그에게 합격 발표 때까지만이라도 과외를 좀 해달라고 했다. 고액과외를 계속하면 부잣집 아이들만 성적을 올려줄 거란 생각에 손 회장은 아예 학원을 차리기로 했다. 그 때가 1990년이다.

학원을 운영하던 중 손 회장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 닥쳐왔다. 부인과 아들,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아들이 일주일만에 죽고, 딸이 9개월 뒤 후유증으로 세상을 뜬 것이다. 손 회장은 절망했다.

그는 “딸 아이가 죽은 뒤 인생에서 더 이상 손해볼 게 없다는 생각과 함께 태어난 것 자체가 저주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손 회장은 고통을 잊기 위해 주 60시간의 살인적인 강의 일정을 소화했다. 일반 공립학교 교사들이 일주일에 15시간 정도 수업을 하는 것과 비교할 때 4배 가까운 시간을 강의에 쏟은 것이다. 이후 손 회장은 1997년 일반 학원가로 옮겨 학생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니는 스타 강사가 된다. ‘손사탐’이란 별명도 이 때 얻었다.

지역이나 경제력에 관계 없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강의를 고민한 끝에 손 회장은 2000년 인터넷 강의 전문 기업 메가스터디를 창업했다. 지난해에는 사재 300억 원을 출연해 청년들의 창업을 지원하는 윤민창의투자재단을 만들었다. 윤민(潤民)은 ‘백성을 윤택하게 하라’는 뜻이자 교통사고로 죽은 손 회장 딸의 이름이다.

손 회장은 “세금은 정확히 다 냈지만 노력에 비해 훨씬 많은 돈을 벌었다는 부끄러움이 있었다”며 “사회에 진 빚을 갚고 싶다는 생각에 재단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재단은 기업가정신을 육성하는 세계적 비영리기관인 카우프만재단을 모델로 하고 있다. 초기 자본 300억 원에서 나오는 연 수익 20억∼30억 원으로 스타트업에 도전하는 청년들에게 지분 투자를 한다.

공모는 1년에 두 차례 진행한다. 손 회장은 “한 팀당 최소 5000만 원을 투자할 생각이며, 이 밖에도 39세 이하 청년들이 창업을 하면 상시적으로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재단은 또 학생들이 재학 중 창업을 경험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장학사업도 진행할 계획이다.

일각에서는 재단 설립을 두고 ‘손 회장이 정치를 하려는 것 아니냐’고 쑥덕공론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손 회장은 손사래를 친다. 그는 “나는 한국 사회의 필요악인 사교육에 전념한 사람이라 자격이 안 되는데다 개인적으로 ‘정치는 미친짓’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이어 “사기업 수장으로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힘든데, 정치를 하게 되면 스스로를 망가뜨릴 것 같다”고 덧붙였다.

대신 손 회장은 교육계 관계자로서 정부에 교육정책을 건의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현 대입제도가 부의 대물림을 부채질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대입제도 아래에서는 경제력에 따라 학벌이 갈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게 손 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대학들이 가칭 ‘계층균형전형’을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소득분위가 낮은 계층 가정의 학생들을 일정 비율 이상 선발하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손 회장은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불평등이 가장 정당한 불평등”이라며 “이미 출발선부터 다르기 때문에 가난한 집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뽑아주어야 교육을 통한 진정한 기회균등이 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손 회장은 일생을 남을 가르치며 살아왔지만 자식들에게는 미안함이 남는다고도 털어놨다. 그는 사고로 아들 딸을 잃은 뒤 다시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가졌다. 그는 자식들에게 종종 ‘너희가 좋은 아빠를 만난 걸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재앙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손 회장은 엄격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걸 마음대로 하게 해준 부모님을 회상하며 “내가 어릴 때 받은 교육에 비해 나는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못해줬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손 회장은 극심한 청년실업난으로 실의에 빠진 청년들에게 ‘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손 회장은 “창업 관련 특강을 나갈 때마다 ‘성공하려고 할 필요 없다, 그냥 도전해라, 한 번의 도전이 인생을 어떻게 바꿀 줄 모른다, 나는 커피를 팔려다 과외를 하고 교육사업에까지 뛰어들게 됐다’고 말해준다”고 설명했다.

인터뷰를 마친 손 회장은 후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일생에 걸친 도전과 시련,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 부끄러움 등은 손회장의 향후 행보를 가늠케 해준다. 그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청년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지 기대된다.

지원선 선임기자 president58@segye.com

손주은은
△1961년 3월 경남 창원 출생△부산 동성고 졸업△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졸업△메가스터디㈜ 대표이사△코스닥 상장법인협의회 이사△메가엠디㈜ 이사△㈜아이비김영 이사△2006한국의 100대 CEO에 선정△모범 납세기업 표창△제 5회 한국 재무혁신 기업대상 최우수상 수상△CEO가 뽑은 2007 올해의 CEO 벤처기업부문 1위△2008 올해의 CEO(성장기업부문)에 선정△2010 한국의 100대 CEO에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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