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처럼 마주 본 두 섬, 한국과 오키나와

입력 2017. 9. 7. 20:16 수정 2017. 9. 7.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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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이명원이 시도한 '오키나와학'
일본과 미국에 의한 '이중식민화' 드러내
자기결정권 회복 위한 민중의 투쟁에 초점

[한겨레]

두 섬-저항의 양극, 한국과 오키나와
이명원 지음/삶창·2만3000원

일본의 남서쪽에서 대만 근처까지 1200㎞에 걸쳐 크고 작은 섬들이 활처럼 휜 모양으로 뻗어 있다. 과거 이 지역에는 동아시아 조공 시스템에 복속되어 중계무역의 이익을 누려온 류큐왕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류큐왕국은 1609년 일본 사쓰마번의 침략을 받아 주권을 상당 부분 잃었고, 1872년에는 ‘류큐처분’으로 끝내 일본에 강제 병합됐다. 태평양전쟁 때 이곳은 일본의 본토 방어를 위한 군사기지가 되었고, 1945년 미군의 상륙으로 무려 24만여명이 숨지는 전쟁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은 이 지역을 또다시 군사기지로 만들었다. 1972년 다시 일본으로 ‘복귀’했지만, 날로 격화되는 미-중 패권 경쟁과 일본의 군사국가화 경향 아래에서 이른바 ‘미-일 동맹’의 단단한 고리인 이곳의 군사적 긴장은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간략하게 정리해본 오키나와의 역사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일제에 의한 식민 지배, 제국주의 전쟁에의 동원, 전쟁의 기억,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관리하려는 미국의 영향 아래 끊이지 않는 군사적 긴장…. 문화평론가 이명원(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은 “한국과 오키나와 사이에 ‘가족유사성’이 있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오키나와를 내재적으로 사유해왔던 그는 새로 낸 책 <두 섬>에서 “오키나와와 한국을 타원 또는 마주 본 거울의 관점으로 조명하는”, 나름의 ‘오키나와학’을 시도한다. 그동안 오키나와와 한국을 통해 동아시아를 읽어내려는 시도가 없지 않았으나, 무엇보다 오키나와를 내재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이명원 ‘오키나와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오키나와 전쟁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일본 오키나와 남부 이토만에 조성된 평화기념공원.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평화의 초석’이 줄지어 서 있다. 이름이 새겨진 24만여명 가운데 조선인은 446명에 불과하지만, 실제 조선인 희생자는 1만여명으로 추정된다. 사진 우베 아라나스(CEphoto). 위키미디어

지은이는 오키나와와 한국의 ‘가족유사성’을 만들어내는 주된 구조로 ‘식민주의’를 지적한다. 둘 다 일본 제국주의·식민주의가 남과 북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양극이었고, 그 아래에서 ‘자기결정권’을 압살당했다는 것. 조선인이 ‘조센징’이라 불리고 차별받았다면, 오키나와인은 ‘리키징’이라 불리며 차별받았다. 간토(관동)대지진 때 일본 자경단은 일본어 발음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골라내어 죽였는데, 여기에는 조선인뿐 아니라 오키나와인도 대거 포함됐다. 사회진화론에 경도된 조선 지식인 이광수가 ‘대동아공영권론’에 기대어 ‘내선일체’를 주창했다면, ‘오키나와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키나와 지식인 이하 후유는 문명 민족으로서 일본과 류큐왕국의 ‘동조동근’을 주창했다.

오키나와 전쟁은 두 섬의 비극적 현실을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다. 이 전쟁의 희생자는 24만여명으로 추정되는데, 이 가운데 조선에서 군부나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동원되어 오키나와에 이르렀다가 희생된 조선인은 1만여명으로 추정된다. 조선인과 오키나와인은 대부분 전쟁통에 희생됐는데, 일부는 일본군에게 스파이 혐의로 살해당하거나 ‘옥쇄’라는 이름의 강제집단사를 강요받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제기한 배봉기(1914~1991)의 증언과 군부로 종군했던 김원영이 남긴 <어느 한국인의 오키나와 생존수기>가 이를 말해준다.

일본의 난세이제도. 일본 본도로부터 대만 근처까지 활처럼 휘어 있는 이 섬들을 오키나와인들은 ‘류큐호’라 부른다. 위키미디어

전쟁이 끝난 뒤 미국에 의한 또다른 식민화가 진행됐다. 분단과 전쟁을 겪었고, 여전히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 등으로 동아시아 군사적 긴장의 한가운데 있는 한국의 상황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미국은 일본에 이어 오키나와를 군사기지로 삼았고,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 등 전세계를 상대로 한 군사활동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일본 국토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 99.4%에 가까운 주일미군 기지가 배치됐다.” 오키나와는 1972년 일본으로 복귀했지만, ‘내부’ 식민지로서 오키나와의 삶은 여전히 반복됐다.

무엇보다 지은이는 ‘식민주의의 양극’인 한국과 오키나와가 스스로를 역동적 주체로 인식하고 ‘자기결정권의 회복’을 위해 투쟁하는 ‘저항의 양극’으로 거듭나는 대목에 주목한다. 그 주역은 시민과 민중이다. 오랫동안 냉전체제에 짓눌렸던 한국에선 역동적인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다. 1995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반대 투쟁은, 일본 본도의 우경화에 맞서며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 이들의 투쟁에선 반전·평화·탈핵의 가치까지 포괄하며 “미래를 전망하는 강인한 풀뿌리 민주주의”에 기반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지은이는 “두 섬이 현재진행형의 연대 혹은 연합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면, 동아시아 역내에서의 평화체제 구축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전망한다. 또 “중요한 것은 무력이 아닌 민주주의로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는 믿음과 실천”이라고 강조한다.

일본 오키나와현 도카시키섬에 선 문학평론가 이명원. 이명원은 한국과 오키나와를 ‘식민주의의 양극’일 뿐 아니라 이를 극복하는 ‘저항의 양극’으로 조명한다. 이명원 제공

이명원 ‘오키나와학’이 고유의 빛을 발하는 지점들에 특히 눈길이 간다. 오키나와 지역에서도 오키나와·아마미 문화권과 미야코·야에야마 문화권 사이에 차이가 있다. 지은이는 중세에 류큐왕국이 등장해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통합된 데에는 오키나와 본도 중심으로 미야코·야에야마 문화권을 억압·착취한 “중세적 국가 폭력”이 있었으며, 이에 저항한 ‘아카하치의 난’과 같은 민중 봉기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자기결정권’을 위한 투쟁에 더 깊고 튼튼한 역사적 지지대를 받치는 관점이다. 반면 오키나와 지식인들의 생각 속에서 같은 ‘피차별 민족’인 홋카이도 원주민 아이누와 대만 원주민 생번을 차별했던 ‘굴절된’ 인식을 끄집어내 ‘오키나와 안의 오키나와’라는 문제 인식을 더욱 확장하기도 한다. 식민주의 지배라는 ‘일본 문제’를 ‘한국 문제’라거나 ‘오키나와 문제’로 호도하는 일본 ‘리버럴’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 또한 명쾌하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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