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마광수 교수 "억울하고 한이 쌓여 울고싶다"

권영미 기자 2017. 9. 5.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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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에로티시즘 문학'의 기수로 잘 알려진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가 5일 숨진 채 발견됐다.

20대 때 홍익대에 조교수로 임용되어 천재교수로 이름을 알리고, 에로티시즘 문학의 기수로 활동한 마광수 전 교수의 생애는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할 굴곡으로 이뤄져 있다.

시와 소설 등 문학은 물론 그림에도 재능을 보인 한 작가의 삶의 중심에는 그가 평생 추구한 에로티시즘과 그를 반대하는 '국가의 폭력', 그리고 '품위'를 중시하는 교수사회의 의견차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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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본 고인의 삶..인터뷰서 억울함 호소
고 마광수 교수 © News1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국내 '에로티시즘 문학'의 기수로 잘 알려진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가 5일 숨진 채 발견됐다. 20대 때 홍익대에 조교수로 임용되어 천재교수로 이름을 알리고, 에로티시즘 문학의 기수로 활동한 마광수 전 교수의 생애는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할 굴곡으로 이뤄져 있다.

시와 소설 등 문학은 물론 그림에도 재능을 보인 한 작가의 삶의 중심에는 그가 평생 추구한 에로티시즘과 그를 반대하는 '국가의 폭력', 그리고 '품위'를 중시하는 교수사회의 의견차가 존재했다. 마광수 전 교수는 28세의 나이에 홍익대에서 조교수로 임용되고 윤동주 연구 등의 권위자로 인정받으며 문단의 기대를 받았다. 이어 33세에 연세대로 옮긴 후 마 교수는 격의없고 파격적인 강의 스타일로 연세대를 대표하는 교수로 이름을 날렸다.

1980년 첫 시집 '광마집' 후 '가자 장미여관으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등으로 큰 인기를 끌던 그는 여대생 사라의 자유분방한 성적 편력을 그린 소설 '즐거운 사라'를 1992년 발표했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인해 '외설 문학'이라는 주홍글씨와 구속이라는 비극을 맞았다. 검찰이 '즐거운 사라'가 음란물 제작 및 배포 혐의가 있다고 수사했고 유죄 판결을 받아 수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세대에서 직위 해제를 당한 것이다. 하지만 생전의 마 전교수에 따르면 이 죄에 대해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 하에서 사면조치됐다.

마광수라는 존재는 우리 사회에서 '시기상조'였을까.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는 마 교수의 문학과 그의 솔직한 언행들은 진지하고 근엄한 대학 교수 사회에서 용인받지 못했다. 동료 교수들과의 마찰로 마 전 교수는 외상성 우울증으로 정신과에 입원, 학교에 휴직계를 제출했고 2002년 한 학기 동안 복직해 강의하다가 우울증 악화로 학기 말 다시 휴직했다. 2004년 건강을 겨우 회복하고 연세대에 복직하는 등 불행으로 인한 상심은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고인은 생전 뉴스1과 인터뷰에서 “한창 일할 때인 40대에 책이 판금되고 구속되는 등 해서 일을 못했다. 일궈놓은 재산도 없는데 연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예전같으면 초판 최소 5만부~10만부를 찍었던 책도 이제는 나가지 않는다"며 "(내 인생이) 억울함과 한이 쌓여 울고 싶다”고 말했다.

© News1

unga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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