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이아이피' 여성 혐오 논란, 제작자 및 영화평론가에게 듣는다
[경향신문]
■표현 수위는 감독의 판단이라 생각…자기검열이 영화 다양성 해칠 수도
솔직히 당혹스럽다. 표현 수위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감독의 영화적 판단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진행했다. 개봉 전 시사를 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다. 사실 영화인들이 둔감했던 건지도 모른다. 젠더 감수성 부족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안타까운 것은,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 수 있다고 보지만 만든 사람의 인격을 폄하하고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는 사람들까지 비하하는 태도다. 박훈정 감독한테는 댓글도 보지 말라고 했는데, 안 볼 수가 없지 않나. 감독이 ‘저 쓰레기 됐네요’라고 하더라. 아주 마음이 아팠다. 예술과 창작 과정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해 과정이 너무 길다는 지적은 수긍한다. 내부에서도 문제 제기가 있었다. 하지만 시나리오상 그 장면의 취지는 김광일이 고개를 돌릴 정도의 잔혹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추격자>(2008)나 <악마를 보았다>(2010) 개봉 이후에는 이런 논란이 없었다. 한국 장르영화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진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지난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안전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심이 높아지면서 지금과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것 같다.
우려스러운 것은 영화인들의 자기검열이다. 앞으로는 표현 수위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 같다. 누군가 농담처럼 ‘이제 디즈니영화나 만들어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 당장 다음 영화를 찍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여성을 과도한 폭력의 희생자로 묘사…이런 창작의 자유는 위축되어야 마땅
창작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여성을 이렇게 묘사하는 창작의 자유는 위축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폭력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올드보이>가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한국 영화에 폭력 묘사를 거침없이 하는 조류가 생긴 것 같다.
피해자들은 다 젊은 여성들이고, 여자들을 고깃덩어리 다루듯이 하고 있다. 불필요하게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에 집중하는 게 아닌가.
사실 감독의 전작인 <신세계>(2012)의 경우에도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자성(이정재)과 정청(황정민)의 브로맨스에 오히려 여성 관객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지난해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 혐오의 문제가 크게 불거졌고 관객들의 인식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이제는 일반 여성 관객들도 여성 혐오적 표현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전 같으면 ‘그러려니’ 하고 포기했던 영화적 표현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영화에서 연쇄살인범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별 고민 없이 만들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외국 영화들의 젠더 감수성은 높아지는 추세다. <브이아이피>를 불편해야 하는 관객들의 요구를 창작 자유에 대한 위축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생각을 더 넓히는 계기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사실 <청년경찰>도 지금은 중국 동포에 대한 묘사 문제만 불거져 있지만, 10대 여성 난자 적출이 등장하는 것도 큰 문제다.
■무조건 여성들이 불편해한다고 해서 필요한 묘사 못해서야…중요한 건 맥락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사회의 흐름을 더 세심하게 봐야 한다는 게 내 입장이다. 시대의 흐름이 창작자 중심에서 수용자 흐름으로 넘어온 지 오래다.
중요한 건 맥락이다. 다소 과도한 표현이라도 극적인 맥락에 맞다면 용인돼야 한다. 가령 폭력적인 남성 캐릭터가 폭력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비현실적이다. 표현 수위만 문제 삼는 것이 파시즘적 행태가 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무조건 여성들이 불편해한다고 해서 작품 자체에 꼭 필요한 묘사까지 할 수 없다면 창작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영화 <도가니>의 경우 폭행 장면이 없었다면 관객들은 덜 불편했겠지만 영화의 완성도는 떨어졌을 것이다. 어디까지 갈 건지는 감독이 선택할 문제다. <추격자>는 표현이 잔혹했지만 폭력을 영화적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영화를 위해 꼭 필요한 지점에서까지 타협하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예술로서든 오락으로서든 다 망하는 것이다. 나는 텍스트의 맥락이 허용하는 한 이보다 더 센 표현이라도 용인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생각해야 할 문제는 이전보다 대중의 의식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는 점이다.
그 결정적 증거가 촛불혁명 아닌가.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갔던 것들도 지금은 문제가 되고 있고 관객들이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시민의식이 형성되면서 이전에는 없던 목소리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제작하는 입장에선 힘들어졌지만, 시대의 변화를 고려해 디테일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여자를 죽이고 때리는 동일 문법 반복…한국영화, 윤리 이전에 예술로 게을러
영화제도 자주 찾아다니고 해외 영화제에 간 적도 있다.<브이아이피>는 안 봤다. ‘보나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영화가 윤리적인 문제 이전에 예술로서 너무 게으른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여성 대상 범죄가 많이 벌어지는데 영화가 이를 재연하는 방식은 실망스럽다.
한국 영화가 도태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도 예전에는 여자를 죽이고 때리는 영화들을 별 생각 없이 봤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 영화는 여전히 동일한 문법을 반복하고 있다. 한국 영화가 앞으로도 이런 선택을 한다면 관객 입장에서는 볼 이유가 사라진다.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표현의 자유는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지 않을까.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에 문제가 있다면 문제가 있다고 말할 자유가 있지 않나. 제작하는 입장에서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본다. 창작자의 표현의 자유니까 뭐든 존중하고 응원하라고 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프랑스어 통역을 하고 있는데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 영화는 왜 여자를 죽이고 신체를 훼손하는 영화만 만드냐고 묻는다. 한국 남자 배우들이 잔혹하고 폭력적인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한국 영화가 다룰 만한 소재들이 아주 많은 것 같은데, 여성 대상 범죄라는 소재를 반복하고 있어서 관객 입장에서 답답하다. 할리우드 영화조차도 성평등적 시각을 강화하고 있다. 시장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관객들에게 맞춰가는 게 맞다고 본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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