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이아이피' 여성 혐오 논란, 제작자 및 영화평론가에게 듣는다

정원식 기자 2017. 9. 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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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브이아이피>는 영화 초반부 여성에 대한 잔인한 살인 장면으로 여성혐오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지난달 23일 개봉한 영화 <브이아이피>를 둘러싸고 ‘여성 혐오’ 논란이 일었다. 김광일(이종석) 패거리의 엽기적인 연쇄살인 행각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드러난 여성 대상 폭력과 여성 신체의 대상화가 논란의 핵심이다. ‘장르 영화가 허용하는 묘사의 범위 안에 있다’는 주장과 ‘과거와 달라진 젠더 감수성을 찾아볼 수 없는 불쾌한 영화’라는 주장이 맞선다. 제작자, 평론가, 페미니즘 시각이 반영된 책을 펴낸 저자 등의 의견을 들어봤다.

■표현 수위는 감독의 판단이라 생각…자기검열이 영화 다양성 해칠 수도

최재원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대표

솔직히 당혹스럽다. 표현 수위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감독의 영화적 판단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진행했다. 개봉 전 시사를 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다. 사실 영화인들이 둔감했던 건지도 모른다. 젠더 감수성 부족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안타까운 것은,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 수 있다고 보지만 만든 사람의 인격을 폄하하고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는 사람들까지 비하하는 태도다. 박훈정 감독한테는 댓글도 보지 말라고 했는데, 안 볼 수가 없지 않나. 감독이 ‘저 쓰레기 됐네요’라고 하더라. 아주 마음이 아팠다. 예술과 창작 과정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해 과정이 너무 길다는 지적은 수긍한다. 내부에서도 문제 제기가 있었다. 하지만 시나리오상 그 장면의 취지는 김광일이 고개를 돌릴 정도의 잔혹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추격자>(2008)나 <악마를 보았다>(2010) 개봉 이후에는 이런 논란이 없었다. 한국 장르영화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진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지난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안전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심이 높아지면서 지금과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것 같다.

우려스러운 것은 영화인들의 자기검열이다. 앞으로는 표현 수위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 같다. 누군가 농담처럼 ‘이제 디즈니영화나 만들어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 당장 다음 영화를 찍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여성을 과도한 폭력의 희생자로 묘사…이런 창작의 자유는 위축되어야 마땅

김용언 | 영화 칼럼니스트

창작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여성을 이렇게 묘사하는 창작의 자유는 위축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폭력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올드보이>가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한국 영화에 폭력 묘사를 거침없이 하는 조류가 생긴 것 같다.

피해자들은 다 젊은 여성들이고, 여자들을 고깃덩어리 다루듯이 하고 있다. 불필요하게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에 집중하는 게 아닌가.

사실 감독의 전작인 <신세계>(2012)의 경우에도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자성(이정재)과 정청(황정민)의 브로맨스에 오히려 여성 관객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지난해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 혐오의 문제가 크게 불거졌고 관객들의 인식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이제는 일반 여성 관객들도 여성 혐오적 표현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전 같으면 ‘그러려니’ 하고 포기했던 영화적 표현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영화에서 연쇄살인범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별 고민 없이 만들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외국 영화들의 젠더 감수성은 높아지는 추세다. <브이아이피>를 불편해야 하는 관객들의 요구를 창작 자유에 대한 위축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생각을 더 넓히는 계기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사실 <청년경찰>도 지금은 중국 동포에 대한 묘사 문제만 불거져 있지만, 10대 여성 난자 적출이 등장하는 것도 큰 문제다.

■무조건 여성들이 불편해한다고 해서 필요한 묘사 못해서야…중요한 건 맥락

전찬일 | 영화 평론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사회의 흐름을 더 세심하게 봐야 한다는 게 내 입장이다. 시대의 흐름이 창작자 중심에서 수용자 흐름으로 넘어온 지 오래다.

중요한 건 맥락이다. 다소 과도한 표현이라도 극적인 맥락에 맞다면 용인돼야 한다. 가령 폭력적인 남성 캐릭터가 폭력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비현실적이다. 표현 수위만 문제 삼는 것이 파시즘적 행태가 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무조건 여성들이 불편해한다고 해서 작품 자체에 꼭 필요한 묘사까지 할 수 없다면 창작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영화 <도가니>의 경우 폭행 장면이 없었다면 관객들은 덜 불편했겠지만 영화의 완성도는 떨어졌을 것이다. 어디까지 갈 건지는 감독이 선택할 문제다. <추격자>는 표현이 잔혹했지만 폭력을 영화적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영화를 위해 꼭 필요한 지점에서까지 타협하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예술로서든 오락으로서든 다 망하는 것이다. 나는 텍스트의 맥락이 허용하는 한 이보다 더 센 표현이라도 용인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생각해야 할 문제는 이전보다 대중의 의식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는 점이다.

그 결정적 증거가 촛불혁명 아닌가.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갔던 것들도 지금은 문제가 되고 있고 관객들이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시민의식이 형성되면서 이전에는 없던 목소리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제작하는 입장에선 힘들어졌지만, 시대의 변화를 고려해 디테일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여자를 죽이고 때리는 동일 문법 반복…한국영화, 윤리 이전에 예술로 게을러

이민경 |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저자

영화제도 자주 찾아다니고 해외 영화제에 간 적도 있다.<브이아이피>는 안 봤다. ‘보나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영화가 윤리적인 문제 이전에 예술로서 너무 게으른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여성 대상 범죄가 많이 벌어지는데 영화가 이를 재연하는 방식은 실망스럽다.

한국 영화가 도태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도 예전에는 여자를 죽이고 때리는 영화들을 별 생각 없이 봤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 영화는 여전히 동일한 문법을 반복하고 있다. 한국 영화가 앞으로도 이런 선택을 한다면 관객 입장에서는 볼 이유가 사라진다.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표현의 자유는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지 않을까.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에 문제가 있다면 문제가 있다고 말할 자유가 있지 않나. 제작하는 입장에서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본다. 창작자의 표현의 자유니까 뭐든 존중하고 응원하라고 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프랑스어 통역을 하고 있는데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 영화는 왜 여자를 죽이고 신체를 훼손하는 영화만 만드냐고 묻는다. 한국 남자 배우들이 잔혹하고 폭력적인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한국 영화가 다룰 만한 소재들이 아주 많은 것 같은데, 여성 대상 범죄라는 소재를 반복하고 있어서 관객 입장에서 답답하다. 할리우드 영화조차도 성평등적 시각을 강화하고 있다. 시장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관객들에게 맞춰가는 게 맞다고 본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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