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쓰지 맙시다. 폭력은” “선배, 너무 빡쎄게 하지 마세요.”
1일 열린 방송의 날 축하연 시작 30분전인 오후 6시. 63빌딩 4층 라벤더홀 앞은 비장한 분위기가 흘렀다. 고대영 KBS 사장이 있는 귀빈실 문 앞은 카메라를 든 남자 기자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 뒤로는 여자 기자들과 일반 KBS 노조원들이 서 있었다. 손에는 고대영 KBS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문구가 적힌 피켓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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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사장이 있는 귀빈실에서 4층 계단까지 KBS 노조원들은 길게 줄을 섰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까지 좁은 복도 안은 북새통이었다. KBS 노조원들은 모두 고 사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행사 시작 10분전인 오후 6시 20분. KBS 노조위원장이 출입문 안에 있는 고 사장을 불렀다. 나와서 대화를 하자고 했다. KBS 직원이자 후배들인데 뭐가 두렵냐라는 말이었다. 고 사장과 그의 수행원들은 몇 번 문을 열고 나오려는 시도를 했다. 노조원들의 위세에 막혀 곧 문을 닫았다.
행사 시작 시간 오후 6시 30분. 경찰들이 들어갔다. 고 사장이 지나갈 길을 터주기 위해서다. KBS 임원진들도 드나들었다.
그 시각 2층 행사장은 부페 식당이 됐다. 지난해에는 모든 행사가 끝나고 식사를 했다. 올해는 기다림에 지친 내빈들이 음식 위에 싸인 비닐 랩을 벗기고 먹기 시작했다. 당초 식사 시간은 축하연 행사 말미에 예정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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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 그랜드볼룸에 고 사장은 겨우 들어갔다. 국회의원들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였지만,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KBS 노조원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았다.
행사장 안은 어수선했다. 지난해에는 유력 정치인들이 왔었고, 그들을 맞으러 장관이 왔다. 방송계 원로들은 이들과 인사하기 위해 주변을 맴돌았었다.
올해는 달랐다. 장관도 없었고 정치인도 없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소속 의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야당은 물론 여당도 보이지 않았다. 인사를 할 사람이 없게 된 이들은 테이블 위 음식으로 향했다. 테이블 주변은 음식을 먹으려는 줄로 싸였다.
6시 45분. 행사가 시작했다. 이날 행사의 호스트인 고대영 사장의 인사말 차례였다. 그 순간 그랜드볼룸 안은 “고대영은 물러나라”라는 구호로 울려퍼졌다. 급히 행사 요원들이 달려갔다. 방송계 몇몇 원로들은 인상을 쓰며 “그만해라”라고 호통쳤다.
고 사장의 인사말이 시작됐지만 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행사장을 앞쪽에 있는 이들 정도만 그의 말에 귀 귀울였다. 나머지는 63빌딩 부페에서 제공하는 다채로운 음식의 맛을 즐기고 있었다.
정우택 원내 대표를 비롯한 정치인도 보이지 않았다. 장관급 인사중에는 이효성 방통위원장이 유일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행사 불참을 선언하면서 예견됐던 ‘참사’였다.
민망해진 진행요원이 조규조 EBS 부사장 등을 메인 테이블 중앙부로 불렀다. 가운데가 채워지니 양 옆이 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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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사장 옆에는 이효성 방통위원장이 자리했다. 고 사장은 민망함을 감추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위원장은 그런 고 사장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행사가 다 끝나고 퇴장할 때 악수 한 번 나눴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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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서는 건배사였다. 고 사장은 “제가 호스트”라며 “그냥 대한민국 방송을 위하여로 건배를 제의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건배사가 이날의 행사 끝이었다. 더 이상의 건배사나 제의는 없었다.
제54회 방송의 날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나운서 원로들은 ‘하하호호’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테이블 주변에서는 웃음꽃이 피었다. 한 방송계 원로가 말했다. “야, 나도 KBS 사장 해봐야겠다.” 그러자 다른 이가 “그거 블라인드로 하니 해볼만하지”라며 웃었다.
방송협회 직원들은 씁쓸한 표정이었다. 방송의 날 행사는 방송대상과 함께 협회 내 가장 큰 연례행사다. 방송협회 관계자는 “다음주 월요일 있을 방송대상 시상식도 연기됐다”며 “이유는 말 안해도 알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