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ce &] 또 다른 갈라파고스..남극 바닷속 '진화'는 현재진행형

원호섭 입력 2017. 9. 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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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살아있는 증거로 주목받는 '남극'

"나는 진화론을 믿는다. 진화가 과학적으로 입증됐다는 과학계의 강력한 합의를 지지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후보 시절 학술지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그는 "지적설계(창조과학)처럼 실험적 검증이 불가능한 비과학적 이론을 가지고 과학적 논의를 흐리는 것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한국보다 창조론자들의 요구가 거센 미국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은 진화론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했다.

반면 한국의 과학기술계는 하 수상(殊常)하다. 과학기술 관련 부처의 장관과 후보자 지명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창조과학'이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은 진화론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히는 데 반해 한국 정부 부처의 장관과 그 후보자는 "진화론을 존중한다"는 말로 후퇴했다. 창조과학을 믿는 것이 "종교적 신념일 뿐"이라는 청와대의 웃지 못할 해명도 나왔다.

1859년 11월 24일 출판된 종의 기원을 시작으로 진화론은 상대성 이론과 마찬가지로 확고한 이론으로 자리 잡았음에도 '가설'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생물의 진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 그 흔적은 DNA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다윈은 갈라파고스군도에서 핀치새의 부리를 본 뒤 종의 기원을 썼다. 수많은 섬이 모여 있는 갈라파고스군도에 사는 생물들은 각각의 섬에서 생존에 유리하도록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했고 환경에 적응된 유전자를 물려줬다. 갈라파고스군도처럼 인근 지역과 격리된 곳에서는 생물의 진화가 눈에 띄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남극바다'다. 5500만년 전 남극 대륙은 남아프리카와 분리됐다. 1000만년 전 남극의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인근 해역의 수온이 5도 밑으로 내려갔다. 현재 남극의 수온은 1.5도에서 영하 1.9도 사이. 수온이 내려가면서 남극 인근을 도는 '해류'가 나타났다. 남극 인근 해역을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던 어류 중 일부가 이 해류에 갇혔다. 갈라파고스군의 섬처럼 다른 곳으로 갈 수 없게 된 셈이다. 이후 어류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거쳤다. 어류에서 갈라져 나온 공통조상으로부터 약 120종의 '독특한' 물고기가 나타났다. 박현 극지연구소 극지유전체사업단장은 "수온이 낮으면 세포 내 단백질이 얼어붙어 생존할 수 없다"며 "이 물고기들은 '비동결단백질(AFP)'을 갖고 있어 차가운 수온에서도 생존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남극 물고기의 진화를 잘 보여주는 3종의 물고기가 있다. 진화가 덜 된 남극대구(남극암치), 가장 진화가 많이 일어난 남극빙어, 그 사이에 존재하는 드래건피시다. 모두 AFP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남극대구에서 남극빙어로 갈수록 헤모글로빈의 수가 적다. 강승현 극지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헤모글로빈은 산소를 온몸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며 "남극은 수온이 낮은 만큼 바닷물에 산소가 많이 녹아 있어 헤모글로빈이 필요 없다"고 설명했다. 김진형 극지연 선임연구원은 "눈으로 봐도 이들이 진화했음이 보인다"며 "유전체를 분석하면 그 사실이 명확해진다"고 덧붙였다.

남극대구의 유전체는 약 6억쌍, 드래건피시는 약 7억쌍의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다. 분석이 끝난 DNA 염기서열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인다.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이 랜덤하게 쭈욱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RNA 분석을 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RNA 염기 세 개가 묶이면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이 생긴다. 가령 염기 UUC는 '페닐알라닌'이라는, UAC는 '타이로신'이라는 아미노산을 만들어낸다. 진화적으로 가까운 종일수록 아미노산의 종류가 같다. 비슷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만약 변이가 일어나서 염기 서열이 바뀌면 기존과 다른 아미노산을 만들게 되고, 이는 생물의 형질이나 기능에 변화를 일으킨다. 진화에서 중요한 '변이'의 출현이다. 만약 이 변이로 인해 나타난 형질의 차이가 생존에 유리하다면 수많은 시간을 거치면서 변이를 갖고 있는 종의 개체수가 많아진다.

DNA는 생물이 언제 출현했는지에 대한 단서도 제공한다. 남극대구는 약 7600만년 전 온대어류인 '큰가시고기'와 분리돼 진화했다. 남극대구와 드래건피시는 200만년 전 공통 조상으로부터 분화됐다. DNA 변이 속도는 유전자마다 생물종마다 서로 다르지만 '몇 년 사이에 몇 개의 변이가 발생하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 이를 '분자시계(DNA 기반 연대 측정)'라고 부른다. 극지연 역시 남극대구와 드래건피시, 큰가시고기의 유전자 차이를 이용해 이들이 언제 서로 다른 종으로 갈라졌는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만약 100만년당 DNA 염기 서열이 1개 변한다고 할 때 두 종의 DNA가 10개 다른 것으로 나타나면 1000만년 전 분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연대 측정은 화석을 이용하기도 한다. 인간과 침팬지의 경우를 예로 들면 먼저 두 종의 DNA를 분석한 뒤 염기 서열 배열의 차이를 구한다. 이후 화석에 나타난 기록을 토대로 공통 조상이 발견된 시간을 계산한다. 종간의 DNA 염기 서열의 차이를 화석 기록에 나타난 시간으로 나누면 몇 년의 시간 사이에 DNA가 얼마나 변했는지 알 수 있다. 안도환 극지연 연구원은 "DNA 변이 속도를 구한 수많은 연구를 토대로 유전자의 변이 개수에 대입하면 서로 다른 종이 언제 분화됐는지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남극대구는 6억쌍의 DNA 염기 서열을 토대로 3만2260개의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이 중 1만3123개는 남극대구 고유의 유전자였다. 드래건피시는 7억쌍의 DNA 염기 서열 중 3만2712개의 유전자를 갖고 있었으며 이 중 333개가 남극의 저온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유전자로 나타났다. 유전자의 상당수는 생물체 내에서 일어나는 물질의 대사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저온 환경에서 체내 에너지를 원활하게 사용하기 위한 변화로 풀이된다. 어느 모로 보나 자연선택설과 딱 들어맞는다. 극지연은 남극 어류 중 가장 진화된 생물로 알려진 남극빙어의 유전체를 분석하고 있다. 김보미 극지연 연구원은 "남극빙어의 유전체 분석이 마무리되면 남극 해역에 살고 있는 물고기의 진화를 보다 잘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현재 지구에 있는 모든 생물의 유전자를 분석하는 '지구 바이오지놈 프로젝트(EBP·Earth BioGenome Project)'를 추진하고 있다. 극지연은 남극 생물 대표기관으로 참여한다. 박현 단장은 "유전체 분석은 생물이 어떻게 살아왔고 특정 환경에서 생존 가능한지 보여주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원숭이가 언제 사람이 되냐고요?…진화론 오해와 진실

"동물원의 침팬지는 대체 언제 사람으로 진화하나요?" 창조론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다. 질문부터 틀렸다. 침팬지와 인간(호모사피엔스)은 공통 조상으로부터 약 700만년 전 분리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원숭이나 침팬지가 어느 날 동물원에서 말을 하고 사람으로 진화한다는 것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진화론과 관련돼 잘못 알려진 이야기들이 많다. '진화'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진화를 단순히 "이전 세대보다 나아진"이라고 해석하는 경향 때문이다. 진화란 생명이 변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간혹 인류를 '진화의 정점'에 있다고 이야기하곤 하지만 잘못된 얘기다. 어류가 물속에서 살 수 있다고 해서 인류보다 낫다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는 "인간이 박테리아보다 모든 면에서 더 나은 존재가 아니다"며 "인간도 진화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갈 능력을 갖게 된 생명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종종 '미싱 링크(잃어버린 고리)' 때문에 진화론이 틀리다는 이야기를 한다. 종과 종 간을 연결하는 '고리'가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시조새는 파충류가 조류로 진화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파키케투스'나 '암불로케우스'와 같은 화석은 육지동물임에도 해부학적으로 고래의 특징을 갖고 있다. 과도기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화석은 무수히 많다. 이를 믿기 싫은 사람들은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진화론에 '론(論)'이 붙은 것을 이유로 '가설'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론에서 이야기하는 '이론'은 증명된 사실로 여러 가설에 적용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진화론이 갖고 있는 '자연선택설'을 중심으로 생명체는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며 진화해왔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이론이 바로 진화론이다. 화석에 의존하던 진화론은 DNA 발견 이후 더욱 분명해지고 정교해졌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도 교황청 과학위원회의 검토를 통해 현대진화론의 가치를 인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진화론은 모든 것을 '우연'이라고 이야기한다는 것도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우연으로 변이가 발생해 진화하는 것은 맞지만 이는 자연선택설을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 자연선택설은 우연으로 발생한 변이 중 환경에 적합한 것을 골라낸다. 특정 변이를 가진 개체가 번식에 유리하여 살아남고 오랜 시간을 거쳐 진화한다.

"강하거나 지능이 뛰어난 종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변화에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 찰스 다윈이 남긴 말로 알려진 이 말은 실은 리언 메긴슨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 경영학과 교수가 '종의 기원'을 요약하면서 남긴 말이다. 누가 이야기했든 이 짧은 문장은 진화론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이덕환 교수는 "창조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수많은 근거로 쌓인 과학과 신앙이라는 종교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종교적 믿음으로 창조론을 받아들이는 것과 과학적 근거가 없는 창조론을 과학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진화론은 인류를 비롯해 지구상에 있는 생물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설명하는 아름다운 이론"이라고 덧붙였다.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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