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적폐도 아닌데 사라져가는 것들

서경호 2017. 8. 31.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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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재정·구조조정·글로벌 시각이 보이지 않는다
기대심리 과도하게 키우는 J노믹스 부작용 경계를
서경호논설위원
적폐(積弊)는 오래 쌓인 폐단이다.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은 문재인 정부의 첫 번째 국정과제다. 과거의 나쁜 관행을 청소하자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적폐는 분명 아닌데도 요즘 사라졌거나 잘 보이지 않는 게 있다. 균형재정·구조조정·글로벌·성장 같은 단어들이다. 사라진 지 오래돼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거나(균형재정) ‘내 삶을 책임지는 정부’의 포용적 성장 정책이 쏟아지면서 우리 사회의 관심에서 멀어졌거나(구조조정), 정부가 얘기는 하지만 왠지 구색 맞추기 같은 느낌(글로벌·성장)이다.

균형재정은 이명박 정부 후반의 핵심 과제였다. 이 대통령은 2011년 8·15 경축사에서 2013년 균형재정 목표를 내걸었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구멍 뚫린 나라의 곳간을 다시 채우겠다는 뜻이었다. 후세에 길이 남도록 정권의 재정 성적표를 잘 포장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을 것이다. 균형재정이 대통령 어젠다로 부각되는 바람에 무리수가 적지 않았다. 재정을 아끼다 보니 4대 강 사업 등 국책사업에 동원된 공기업 살림이 거덜 났다. 균형재정 도그마에 빠져 경기 대응이 시원치 않다는 비판도 받았다. 균형재정은 그때가 끝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저성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년 20조~40조원의 적자 국채를 발행했다. 기존 빚을 갚는 차환용 발행이 많았지만, 아무튼 세입보다 지출이 많은 적자재정이었다.

내년 예산안도 30조원에 육박하는 적자재정이다. 외환위기나 금융위기도 아닌데 경제성장률보다 지출증가율이 높은 건 이례적이다. 지출은 실제 상황이지만 세입은 전망이다. 지출은 현금이고 세입은 어음 같다고나 할까. 어음이 부도나면 그만큼 재정적자와 국가채무가 늘어난다.

물론 균형재정이 지고지순의 가치는 아니다. 필요하면 적자를 감수하고 재정이 소방수나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게 지속 가능하지는 않다. 나라 살림도 우리네 살림살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들어온 돈보다 많이 쓰면 언젠가는 펑크가 난다.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가 기력을 회복한 뒤 과거 정부가 균형재정 달성을 목표로 내세우곤 했던 것도 이래서다. 그런데 현 정부는 재정의 마중물 역할을 어느 시점에 끝내고 균형재정을 언제쯤 다시 도모할지 도통 말이 없다. 자신이 없거나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거나 둘 중 하나다. 지금처럼 모든 현안을 재정으로 해결하려는 건 신해룡 전 국회예산정책처장의 비판적 표현대로 ‘재정 알코올중독(fiscal alcoholism)’이다.

구조조정이란 말도 쑥 들어갔다. 경제가 좋아져서일까. 글쎄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상장사의 2분기 영업이익은 17% 넘게 증가했지만 10대 그룹을 제외하면 20% 이상 하락했다. 반도체 등 일부 업종의 초호황에 따른 착시효과를 걷어내면 실물 경기는 여전히 좋지 않다. 촛불과 선거 정국을 지나면서 우리의 위기의식이 무뎌진 건 아닌지 걱정된다. 사람과 일자리·복지를 중시하는 새 정부의 J노믹스가 정부에 대한 국민 기대심리를 과도하게 키우는 부작용은 없는지 경계해야 한다. 중소기업과 벤처 중심의 혁신 생태계도 중요하지만 중소기업이라고 구조조정의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은 외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정책도 국내 이해관계자만 바라보지 말고 글로벌 시각에서 정교하게 벼려야 한다. 경제부처 전직 장관은 “새 정부는 글로벌 시각이 부족한 것 같다”고 걱정했다. 실제로 법인세 인상처럼 글로벌 흐름과 따로 가거나 소득 주도 성장처럼 ‘독특한’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물론 지금의 대외 건전성은 양호한 편이다. 그래도 글로벌 안테나는 24시간 세워둬야 한다. 국제금융통이었던 고(故) 김익주 국제금융센터 원장은 2013년 ‘국제금융시장 앞에 겸손해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중앙일보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언제 어떻게 엉뚱하게 불똥이 튈지 모른다. … 위기는 때때로 합리적인 인과관계를 무시하고 전염되기 때문이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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