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연의 시시각각] 끼리끼리가 적폐다

최상연 2017. 8. 31.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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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부처마다 적폐청산 TF 러시
전 정부가 그러다 적폐 몰렸다
최상연 논설위원
왕란과 특란, 대란 중 어느 게 가장 큰 건지 구별할 수 있다. 마트에 갈 때마다 계란 진열대를 거르지 않다 보니 익숙해졌다. 친환경 계란과 그냥 달걀의 가격 차이도 잘 알고 있다. 진열대 앞에선 가격표와 많은 대화를 나누다 결국 친환경 쪽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풀어 먹인 암탉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상상을 했다. 그래서 살충제 계란, DDT 닭엔 화가 난다. 거기에다 독성 생리대, 유럽산 간염 소시지까지 나왔다. 광우병과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의 난리를 겪고도 바뀌는 게 없는 나라가 야속하다.

살충제 계란은 광우병·세월호와 닮은 구석이 많다. 경보음을 뭉개던 당국이나 선장이 ‘괜찮다’고 공언한 직후 사고가 터진 게 우선 그렇다. 사건을 키운 한심한 뒤처리도 어슷비슷하다. 책임자가 책임지지 않고 마냥 뭉개는 것도 여전하다. 세월호 참사 땐 양우공제회가 등장했는데 친환경 뒤엔 ‘농피아’가 숨어 있다고 한다. 모두들 DNA가 같은 적폐다. ‘이게 정부냐’고 욕하며 새 정부를 꾸렸지만 솜씨는 다른 게 없다. 다른 건 광화문에 촛불 나왔다는 얘기가 없다는 거다.

반정부 시위로 이어지지 않는 건 일단 공포감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계란 사태는 불법 살충제 오남용이 본질이다. 케미포비아 역시 아직은 걱정과 한숨 단계다. 그런데 광우병도 괴담이 동력이었던 걸 보면 야당의 무능과 나태함이 분노와 불안을 결집시키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보수는 보수(報酬)를 줘야 한다’는 농담을 만든 굼뜬 야당이다. 하지만 뭐라고 해도 아직은 새 정부에 대한 불만 지수가 높지 않은 게 정답에 가깝다. 여론조사론 ‘정부 발표를 신뢰한다’는 응답이 ‘그렇지 않다’는 쪽보다 훨씬 높다. ‘전 정부 책임론’이 지지층에 먹혔다.

전 정부 탓은 마법의 지팡이다. 청와대와 여당에 따르면 인사검증 실패도 전 정부가 사용한 검증 방식을 사용한 때문이며 교원 수급 불균형도, 국가 부채 급증도 모두 전 정부 책임이다. 노무현 정부 때 시작된 문제도 많다. 하지만 이 정부는 검찰이든 국정원이든 적폐라면 언제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일이다. 적폐 청산 TF가 부처마다 러시다. 교육부는 국정 역사교과서, 환경부는 4대 강 사업을 캐겠단다. 태극기 집회에서 ‘계엄령 선포’를 주장한 보수단체 관계자들에 대해선 경찰이 내란선동 혐의로 수사에 나섰다.

묵은 때를 씻어내자는 대의는 옳다. 문제는 이런 식이면 살충제 계란이란 적폐가 제대로 청산되겠느냐는 거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적폐 청산이 그랬다. 전 정부 사람이면 전염병 환자 보듯 솎아내고 줄세우는 데 열심이었다. 그 와중에 국정원이든 검찰이든 아니면 어느 부처든 블랙리스트가 나돌았다. ‘100% 대한민국’을 내세웠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렀다. 반대 세력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가 에너지였다. 그때도 지지자들에겐 그게 먹혔다. 그러다 적폐로 몰렸다. 그리고 광우병이든 세월호든 적폐는 남았다.

따지고 보면 지난 10년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우리 편이 아닌 편을 적폐로 모는 건 한국 정치의 오랜 적폐였다. 표적 청산, 정치 보복을 써놓고 늘 적폐 청산이라고 읽었다. 그러니 바뀌는 게 없는 대한민국이다. 문재인 정부가 다를 게 없다. 적폐 청산이 사법부와 공직 사회, 공영 방송을 장악하려는 새 적폐란 인상이 굳어지면 반대 쪽의 저항만 키울 뿐이다. 협치가 가능할 까닭도 없다.

적폐 청산을 내걸고 탄생한 정부라면 적폐 청산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적폐가 적폐를 청산할 수 없고 더구나 적폐론 적폐가 청산되지도 않는다. 적폐를 걷어 내려면 적폐의 제도와 환경을 들어내는 게 우선이다. 끼리끼리가 적폐다.

최상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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