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배틀그라운드의 매력 병사들의 대화를 경험하다
[게임의 법칙-47] 1. 2017년 8월 어느 날, 러시아 흑해 에란겔 섬 포친키 마을 부근
"글쎄요."
폐허 속 잔해를 뒤지던 손을 잠시 놓으며 A가 말했다. 마찬가지로 무너진 건물 틈에서 반쯤 부서진 오토바이 헬멧을 꺼내들며 내가 무심코 던진 질문이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잠시 깨진 유리창 너머로 창 밖의 동태를 살피던 A가 말을 이었다.
"다른 길이라면…."
"잠깐, 쉿."
말을 끊으며 A가 몸을 낮췄다. A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점점 다가오던 자동차 소리는 우리가 숨어 있는 가옥 근처에서 멎었다. 놈들이 우리 건물로 들어올 모양이었다. 차에서 내린 듯한 발소리가 점점 우리가 숨은 건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쪽은 우리의 존재를 모를 테니 아무래도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해 보였다. 적당한 엄폐물 뒤에서 샷건을 잡은 손에 긴장을 주었다.
적들의 발소리가 멈추고 현관문이 삐걱 열렸다. 찰나를 치고 들어오는 적의 잔영을 향해 샷건을 쏘아댔다. A의 라이플도 불을 뿜었다. 몇 초도 걸리지 않은 순간에 상황을 정리하고 우리는 쓰러진 적들의 소지품을 뒤졌다. 진통제 몇 알과 조금 흠집난 헬멧을 챙겨들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잘됐네요. 놈들이 타고 온 차를 우리가 쓰죠. 이걸로 원 중앙까지 이동할게요."
A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걸어서 가면 제 시간에 못 닿을 위치였는데 마침 운이 좋았다.
"여튼 그래서 저는 다른 길을 좀 찾아볼 생각이에요. 엊그제 면접도 한 군데 봤고, 잘 풀리면 좋겠네요."
전방에서 시선을 놓지 않는 운전자 A가 아까 미처 못다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도 주위 능선을 눈으로 살피며 입과 귀로 대화를 받았다.
"네, 저도 예전에 참 방황이 심했더랬죠. 뭐 지금도 딱히 정착한 삶이라고 부르긴 뭐하지만."
"어떠셨기에요?"
"비슷합니다. 하고 싶은 일과 주어지는 일 사이의 고민들. 돈이 되는 일과 돈 안 되는 일 간의 갈등들. 현실의 삶과 살고 싶은 삶의 간극은 좀처럼 메워지지가 않네요. 그냥 어느 날부터는 사는 대로 사는 와중에 방향타만 놓치지 않으려고 바등거리는거죠."
"일단 여기서 대기 타시죠. 위치도 좋고 아이템도 먹을 만큼 먹었어요."
슬쩍 뉘엿하게 넘어가는 해가 비치는 농가 앞의 들판은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다. 100명이 뛰어내린 이 섬의 안전지대도 이제 슬슬 좁아지고 있고 생존자는 이제 30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다음 원이 좁혀지면 살아남기 위해 또 다른 이들이 저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 올 것이고, 우리는 이제 느긋하게 기다리며 평야의 손쉬운 타깃들만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전투 사이사이에 펼쳐지는 여유로운 시간이 간지러워 나는 입을 열었다.
"저는 회사 다니던 시절하고 비교해 보면 확실히 경제적 문제가 크게 다가오긴 해요. 월급이 주는 풍요는 월급쟁이 시절에는 잘 느껴지지 않는 안정감이죠. 차라리 그냥 주욱 월급쟁이였다면 좋았을 거예요. 막상 프리랜서 생활의 맛을 한 입이라도 보게 되면 갑갑해서 회사 못 다니게 되죠."
"그럴 거 같습니다. 저는 그래서 가급적 하고 싶은 일을 다루는 회사에 몸을 담고 싶어요. 이번 면접 본 데도 그런저런 요건들이 잘 맞는 데라서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잠깐, 220도에 적!"
말하다 만 A의 손에 들린 kar98k 저격소총이 불을 뿜었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내다본 창밖으로 두 사람이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A의 저격총이 한 사람을 쓰러뜨렸고, 뒤이어 나의 자동소총이 동료를 구하려는 적을 쓰러뜨렸다. 벌써 두 팀을 잡은 오늘은 뭔가 풀리는 날이었다. 생존자는 20명대로 줄었고, 우리는 들뜬 마음에 들판에 쓰러진 적의 아이템을 확인하기 위해 건물을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즐거움은 거기까지였다.
"타타탕 -."
아, 왜 그 생각을 못했던 걸까. 사방에 숨어 인기척을 기다리는 생존자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의 총소리를 듣고 위치를 짐작한 다른 팀이 우리가 아이템을 먹으러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기다릴 거라는 생각은 갑자기 잘 풀린 게임의 흥분 탓에 닿을 수 없는 거리가 되고 말았다. 앞서 뛰던 A가 바닥에 쓰러졌고, 살릴 것인지 도망칠 것인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 또한 석양이 내린 들판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두워지는 화면 위로 뜨는 전투 결과는 48팀 중 11위. 나쁘지는 않지만 좋다고 하기도 어려운 전투 결과가 검은 화면에 떴다. 같은 순간, 블루홀 스튜디오의 게임 '배틀그라운드' 서버 로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배그 서버 이상 없음."
위 내용은 실제로 내가 '배틀그라운드' 듀오 플레이를 하며 겪은 사건 하나를 조금 각색한 글이다. 100명의 플레이어가 고립된 섬 안에서 벌이는 배틀 로얄이 주제인 '배틀그라운드'는 여러모로 여타 밀리터리 액션 게임과 다른 점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팀 플레이를 하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차이점은 바로 게임의 긴장 지점 사이사이에 스며든 '비는 템포' 였다.
많은 게임들은 빠른 템포와 박진감으로 한 판의 플레이를 꽉 채우려는 경향이 강하다. '스타크래프트'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처럼 한 판 한 판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쟁형 게임들은 이른바 APM(Actions Per Minute·분당 명령 횟수)을 따질 정도로 매 상황이 긴박한 편이다. 그런데 100명이 무차별하게 경쟁하는 '배틀그라운드'에는 오히려 100대1의 경쟁률에도 불구하고 간혹 대단히 한가한 순간들이 나오곤 한다.
아이템 파밍이 안전한 곳에서 이루어질 때, 안전가옥에 자리를 잡고 적을 기다릴 때 같은 상황들이다. 이 게임 또한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적의 존재 때문에 결코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적을 만났을 때의 교전은 굉장히 긴박해져 결코 템포 자체가 느린 게임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처럼 게임이 아닌 게임 밖의 이야기를 한가롭게 풀어내도 어울리는 순간들이 나타난다는 건 재미있는 지점이다.
이 여유로움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무래도 게임의 순위 자체가 100% 실력에만 기대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어마어마한 동체 시력과 컨트롤로 보이는 적들을 족족 사살해낼 수 있는 FPS의 대가라고 해도 '배틀그라운드'에서는 반드시 우승을 장담하기 힘들다. 안전구역의 위치와 은폐정도에 따라 한 개의 킬도 따내지 못한 사람이 우승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바짝 날을 세운다고 해서 우승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기에 어떤 이들은 굳이 우승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게임의 긴장감을 즐기며 보이스 채팅으로는 그저 잡담이나 즐기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든다.
특히 듀오 / 스쿼드 등 팀 플레이 보이스 채팅을 통해 이뤄지는 비는 템포의 상황은 마치 전쟁 영화에서 하나의 전투가 끝나고 난 뒤 참호 안에서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나누는 고향 이야기와 같은 상황과 이어진다. 이는 전투-휴식-대기-전투로 돌아가는 전쟁의 사이클 중 기존의 게임들이 전투만을 다룬 것에서 벗어나 대기 장면까지도 게임 안에 담아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이렇게 되면서 '배틀그라운드'는 전쟁 장면의 독특한 지점을 그려내는 게임이 된다. 바로 병사 개인의 모습이다. 언제 어디서 적의 사격에 쓰러질지 모르는 긴장감 넘치는 전장, 그러나 격렬한 아드레날린의 전투 사이사이에 펼쳐지는 비는 템포 속에서 풀어지는 긴장감의 현장까지를 '배틀그라운드'는 통째로 담아낸다. 국면으로서의 전투를 넘어 삶의로서의 전장을 다루게 된 것이다. 마치 전쟁 영화 속에서 담백하게 자신의 삶을 되짚는 병사들의 대화처럼 '배틀그라운드'에 참전한 팀 플레이어들의 보이스 채팅 또한 게임 안의 상황을 넘어 그들의 일상까지 파고드는 현장을 겪어 보면 왜 전쟁 영화 속 병사들이 참호 안에서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는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곤 한다.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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