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애나의 파멸 영국 왕실엔 구원
[경향신문] ㆍ내일 20주기 맞아 조명
“다이애나와 영국인 사이엔 복잡하고도 전례가 없으며 부정할 수 없는 ‘케미(화학적 관계)’가 있다.” 영국 작가 힐러리 맨텔은 영국 왕실에 등장한 직후부터 숱한 이야기를 만든 영국의 고 다이애나비를 이렇게 설명했다.
1997년 서른여섯의 짧은 생을 마감한 이후 더 많이 회자된 그에 대한 관심은 31일(현지시간) 20주기를 앞두고 더 높아지고 있다.
■ 과잉소비 속 사라진 군주제 논쟁
20주기를 맞아 세계 언론은 다이애나의 동화 같았던 결혼식, 힘들었던 왕실 생활과 찰스 왕세자와의 이혼,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 두 왕자의 현재 심경 등을 쏟아내고 있다. 찰스와의 결혼에 불만을 토로하는 다큐멘터리, “장난스러운 엄마”와의 “마지막 짧은 통화를 후회”하는 왕자들의 회고 다큐도 공개됐다. 1981년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열린 결혼식 영상도 초고화질로 복원돼 유튜브에 공개됐다.
맨텔은 여전히 과잉소비되는 ‘다이애나 현상’을 ‘영국의 집단적 창조물이자 집단적 소지품’이라고 했다. 가디언은 ‘우리는 여전히 왕실 관음증이다’라는 제목의 사설(26일자)을 통해 자성했다. “20주기는 반성을 위한 순간이다. (영국의) 군주제에 대해 20년 전보다 진보된 고민도 없고 논쟁조차 사라졌다. 지금 왕실이 21세기, 포스트 다이애나, 포스트 브렉시트 시대의 영국에 적합한지 생각해볼 수 있는 때이다.”
다이애나의 이혼과 사망으로 드러난 왕실의 실체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 들끓었던 군주제 폐지론을 잦아들게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다이애나의 죽음이었다.
영국 더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제니 러셀은 “(다이애나가 왕실에 들어왔을 때) 왕실은 무능하고 (시민들과) 동떨어져 있던 반면 (마거릿 대처) 총리는 카리스마가 넘쳤다”며 “그러나 지금은 총리와 정치인들이 (대중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혼란스러운 존재로 그려진다. 진지한 윌리엄과 장난스러운 해리가 희망을 제시하는 공인이 됐다”고 말했다. 이 기고를 실은 미국 뉴욕타임스의 제목은 ‘다이애나가 여왕을 구했다’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012년 왕좌에 오른 지 60주년을 맞아 영국 사상 두번째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치렀다. 당시 여왕 지지율은 80%에 달했다. 아흔 살을 맞은 지금도 60%에 이른다. 특히 영국의 왕실에 대한 지지는 다이애나의 두 아들,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가 큰 축이다.
이달 초 실시된 여론조사기관 유고브(YouGov) 조사를 보면, 윌리엄(78%)과 해리(77%)에 대한 긍정적 시각은 찰스 왕세자(27%)의 3배나 된다. 윌리엄 왕세손과 2011년 결혼한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73%)도 한몫한다.
■ 다이애나, 새 군주제 선물?
다이애나 이후 왕실은 결혼이 상호공존과 이해, 사랑을 바탕에 둬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였다. 이제 찰스에겐 카밀라가 있고, 두 왕자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됐다. 평민 출신의 왕세손비는 왕실에 대한 환상 없이 결혼했으며 다이애나와 같은 왕실 속 고립도 겪지 않는다. 윌리엄이 “나의 인생을 가장 공유하고 싶은 사람”으로 소개한 케이트는 왕세손의 아내로, 조지 왕자와 샬럿 공주의 엄마로 왕족의 공무를 하고 있다. 특히 아이들의 심리·정신건강 관련 문제를 중심으로 8개 어린이 단체를 후원 중이다. 인디펜던트는 “윌리엄이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시간이 무르익었을 때 (시민들은) 왕과 왕비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된 것이 다이애나의 가장 큰 유산”이라고 봤다.
시민 10명 중 4명 정도도 다이애나의 등장과 죽음이 왕실을 좋은 방향으로 바꿨다(44%·유고브)고 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32%)는 이들도 있다. 올 1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건강 이상설이 나오자 ‘여왕 이후의 군주제’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쏟아졌다. 왕자와 왕세손비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가 높지만 점점 떨어지는 왕실에 대한 신뢰도를 지탱해주는 것은 여왕의 권위가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영국 왕실의 폐지 위기는 수십년 전부터 있었다. 다이애나는 금기를 말하고, 건드릴 수 없는 것에 손을 대며 왕실을 바꿨다. 감정을 감추는 영국인들이 열광하고 분노에 가까운 슬픔을 표현할 수 있도록 변화시켰다. 윌리엄·해리 왕자가 찰스 왕세자 대신 대중의 인기를 받으면서 영국 군주제 폐지에 대한 위협을 없앴다. 그의 등장과 죽음은 21세기 군주제에 대한 숱한 의문을 남겼지만 왕실의 유용성과 별개로 비이성적이며 검증되지 않은 필요성 덕에 군주제는 유지되고 있다는 비판은 계속되고 있다고 가디언은 분석한다.
2017년 영국인들은 다이애나를 무엇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유고브 조사에서 시민들은 ‘국민공주’(26%)와 ‘교통사고 사망’(19%)을 많이 꼽았다. 이어 ‘사적인 삶과 스캔들’(15%), ‘윌리엄·해리의 엄마’(12%), ‘연민’(10%) 등이었다. 러셀은 “다이애나가 스스로 자신을 (아이콘으로) 만들고 (죽음으로) 파멸시켜 가족에게 현대의 새로운 군주제를 선물했다”고 말했다.
<김보미 기자 bomi83@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덕수 지명 함상훈 후보자, ‘요금 24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판결 전력
- 무역전쟁 중 ‘이 나라들’ 조용히 웃는다
- [속보] 창원지법,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 명태균·김영선 보석 허가
- “신세 많이 졌습니다”···윤석열 파면으로 ‘기쁨의 영업종료’ 향린교회
- [단독]경호처, ‘윤석열 체포 저지’ 반대 간부 해임징계 한덕수에 제청
- [속보] 법사위, 대통령 권한대행 헌법재판관 지명 막는 법안 통과
- [단독] 민주당, ‘민주파출소’ 이어 ‘민주소방서’ 준비…대선 가짜뉴스 대응 강화
- ‘원고 한국, 피고 북한’ 재판 3분 만에 종료···‘남북사무소 폭파’ 손배소, 비용 다시 산정
- 붙잡자니 올드하고 놓자니 아까운 이름…현대건설이 힐스테이트·The H 대신 ‘현대’로 이벤트
- 한동훈, 국회 계단에서 대선출마 선언하는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