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타이틀 이헌정

서울문화사 2017. 8. 29.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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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미국인 마크 테토가 도예, 공예, 회화, 가구 등 한국 작가의 공방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지난달 사진작가 구본창에 이어 이번 달에는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드는 멀티 도예가 이헌정을 만났다.




소중한 우리의 것을 알고 지켜나가기 위한 길라잡이 ‘마크 테토’. 한옥에 살며, 한국의 고가구를 모으고 우리의 전통 악기인 거문고를 배우기까지 한국의 문화에 푹 빠져 있다. 이런 마크 테토가 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한국의 작가를 알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번 달에 만난 작가는 그릇에서부터 추상적인 오브제, 조각, 타일 그리고 테이블, 스툴, 라운지체어 등의 디자인 가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업들을 하고 있는 이헌정 작가다. 치밀한 계획과 의도가 아닌, 전적으로 우연과 직관에 의존해 작업하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는 이헌정을 만난 이야기를 소개한다.



마크 테토(Mark Tetto)
JTBC <비정상회담>의 훈남 패널로 이름을 알린 마크 테토. 한국에 산 지 7년째로, 예스러운 한옥의 매력에 푹 빠져 북촌 한옥 마을에 살고 있다. 한국 특유의 미학과 기품을 품은 작품을 좋아한다. 그리고 매달 한국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가서 나눈 대화를 <리빙센스> 독자와 공유한다.

1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이헌정 작가의 작업실인 ‘캠프 A’. 2,4 이헌정 작가가 수양 삼아 만든 달항아리가 곳곳에 놓여 있는 ‘캠프A’. 3 작업실 옆 별채이자 이헌정 작가 부부의 주거 공간.

M 안녕하세요, 작가님. 마크 테토라고 합니다.
어서 오세요. 제 아내가 마크 테토의 팬이에요(웃음). 이헌정이라고 합니다.

M 작가님을 만나뵙기 전 나름 공부를 해봤는데요(웃음). 도예가라고 알고 있었는데 제가 감명 깊게 봤던 청계천의 핸드프린팅 벽화와 포시즌스 호텔 서울의 로비에서 본 옻칠 도자기 함 모두 작가님께서 만들었다는 걸 최근에 알았어요. 작업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요.
네. 제 모든 전시의 제목을 ‘여행(Journey)’이라고 이름 붙이는데요. 이때 여행은 시공간의 이동을 말하는 게 아니고요. 도예라는 한정적인 울타리를 벗어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예술에 대한 자유로운 사유와 여정을 말해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자 도예에서 시작해 조각, 개념 미술, 건축, 디자인까지 서로 다른 장르의 작업을 같이하고 있어요. 세라믹이라는 소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저만 할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고 있죠.

M 매달 ‘마크 테토의 물물기행’을 하면서 사진가, 설치미술가, 가구 디자이너, 서양화가, 소반 작가까지 다양한 분야의 작가님들을 만나봤는데요. 작가님은 도예가나 세라믹 아티스트라기보다 ‘여행가(Journey Man)’라고 불러야 될 거 같아요(웃음).
어떤 잡지에서 그랬어요. 2010년인가? 앞으로 ‘10년을 이끌어갈 크리에이터’, 이런 제목으로 해서 10명을 뽑은 적이 있었어요. 이름 앞에 아티스트, 디자이너, 뮤지션 등의 타이틀을 달았는데요. 저는 ‘언타이틀 이헌정’이었어요(웃음).

M 하하하. 저도 본 것 같아요. 지금 차를 따라주신 이 작은 찻잔부터 설치작품에 디자인 가구까지 모두 만들다니요. 제가 사진으로만 봤던 가구도 여기 있네요. 테이블, 스툴, 욕조 모두 조각적이면서도 실용적인 기능을 가졌어요. 2009년에 할리우드 배우 브래드 피트가 작가님의 가구를 구매했다고 들었어요!
한국에선 처음으로 서미갤러리가 세계적인 디자인 페어인 ‘디자인 마이애미’(바젤 2009)에 참여했어요. 그때 그곳을 방문한 브래드 피트가 세라믹과 콘크리트로 만든 라운드 테이블을 구매했어요. 유명한 힙합 아티스트이자 사업가인 퍼프 대디도 있고 건축가 노먼 포스터, 설치미술가 제임스 터렐, 현대미술 작가 수보드 굽타 같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도 제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요. 감사한 일이죠.

M 멋져요! 모두 이곳 경기도 양평에서 만들어진 작품인가요?
네. 이곳은 14년째가 되어가는 제 작업실이에요. 제가 각 공간의 내부와 외부를 구상하고 모형으로 정교하게 만든 후 건축 사무실에 의뢰해 지었어요. 집과 작업실, 갤러리가 함께 모여 있는 곳이에요. 나무, 콘크리트, 쇠를 이용해 최대한 단순하게, 건물의 골조가 드러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어요. 저는 이곳을 ‘캠프 A’라고 불러요.

M 에베레스트산을 올라가는 사람들이 늘 베이스캠프를 마련해두잖아요. 작가님의 예술 여행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 바로 여기 양평에 있는 ‘캠프 A’네요.
이곳을 지으면서 아트 퍼니처를 만들기 시작했죠. 세라믹과 콘크리트로요. ‘캠프 B’도 있어요. 2016년 가을, 다산성곽길 모퉁이에 문을 열었어요. 1층과 지하 1층은 갤러리 겸 쇼룸과 브런치 카페, 2층은 게스트하우스로 나뉘어 있어요. 제가 만든 가구와 그릇, 오브제의 쓰임새를 일상의 공간 속에서 보여줄 수 있도록 만든 곳이에요.

M 작가님의 작품은 정형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어요. 투박하지만 메시지가 있고요. 저희 집에 신라시대 토기가 하나 있는데 달항아리처럼 완벽한 동그라미는 아니고 불완전한 모양이에요. 영어로는 임퍼펙션(Imperfection)이라 하는데요.
무한한 손의 반복과 노동으로 만든 작품이지만 늘 우연과 직관에 의존해서 흙과 불에 결과를 맡겨요. 특히 가마 속 불길의 경로와 온도 변화, 그리고 도자기와 가마의 복잡한 곡면에서 일어나는 무궁한 변화와 우연은 계산해두지 않아요.

M 이 찻잔도 마찬가지예요. 완벽하게 정형화된 찻잔은 들고 있기가 불편한데요. 자연스럽게 손에 감기고 마음도 차분하게 해줘요. 작가님 작품에는 모두 자연스러움이 담겨 있어요. 반듯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거나 비뚤비뚤하고요. 표면도 고르지 않아요.
주로 핸드빌딩 기법, 그러니까 흙을 판형으로 만들어 손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성형을 해요. 형태를 만들고 연마하는 과정의 흔적이 여과 없이 드러나요. 늘 오랜 시간 노동을 하듯이 반복적으로 신체를 움직이고 시간을 들여 구워냈음에도 오히려 즉흥적이고 순수한 작품이라는 평을 많이 들어요.

1 중국으로 갈 테이블을 작업 중인 야외 작업실에서 마크 테토와 이헌정 작가. 2 캠프 B 앞에 선 이헌정과 이곳의 운영을 맡고 있는 아내 조현주 그리고 마크 테토. 이헌정 작가의 작품은 캠프 B는 물론 바다디자인아틀리에(www.badadesignatelier.com)에서도 볼 수 있다.


1,2 다산성곽길 모퉁이에 위치한 ‘캠프 B’의 지하 공간과 1층 쇼룸에서의 이헌정 작가.

M 유약도 한 가지 색깔이 아니라 여러 색이 주스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어요.
저는 ‘불’을 컨트롤하지 않아요. 흙이 가마에서 익어가는 동안 저는 ‘노동’만 제공해요. 이런 건 제가 그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모두 가마 안에서 나오는 거예요. 저는 자연의 일부이자 작은 존재일 뿐이에요. 도자기를 굽다가 이런 경이로운 순간을 마주하면 저절로 겸손해지죠.

M 이 유약은 어떤 건가요?
이건 투명유 계통이에요. 이름을 따로 붙였는데 단순해요. ‘잘 흐르겠지 유’예요(웃음). 흙이 구워지는 1300℃에서 흘러내리게끔 녹는점을 낮춰놓은 유약이에요. 자연의 ‘불’에 따라 잘 흐르게끔, 흐르면서 재미난 현상이 나타나게끔 했어요.

M 그럼 유약은 언제 바르나요?
흙으로 도자 모양을 만들었으면 불에 넣고 구워야 하잖아요. 높은 온도에서 구워지는 동안 고무처럼 말랑말랑하게 되는데, 그 정도까지 돼야 물도 흡수 안 하고 단단해져요. 높은 온도에서 완전히 구운 다음 유약을 바르고 낮은 온도에서 한 번 더 구워요.

M 도자를 하시면서 처음에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모양이 아닌, 정형화된 전통 도자를 만들기 시작하셨죠?
네. 아직도 공부하는 느낌으로 일 년에 몇 개씩 달항아리를 만들어요. 한 달을 잡고 작업해서 하나씩 만들죠. 옛날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완벽한 형태의 달항아리를 만들다 보면 형태, 좌우 밸런스, 대칭 그리고 철학을 다시금 배우고 깨치게 돼요. 아주 깊은 명상으로 빠지게 되죠. 제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가도 달항아리를 만드는 동안 겸손해져요. 미천함을 느끼죠.

M 늘 창조적인 작업을 하면서도 전통의 도자를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제 작품이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과 달리 제 자신은 매우 치열하게 작업을 하고 있어요. 어쩌다가 가마에서 너무 쉽게 근사한 작품이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런 작품들에는 애정이 안 생겨요. 항상 스스로 힘들고 외로운 상황을 만들어요. 감정의 깊은 골까지 간 다음에야 작품에 빠져들고,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서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나와요. 정상적으로 미술을 생각하면 미술을 하지 않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정도밖에 못 나오잖아요(웃음).

1,2 캠프 B의 2층 게스트하우스. 테이블과 펜던트 조명, 양손 모은 사람 오브제, 달항아리 등은 모두 이헌정 작가의 작품이다. 3 1층 쇼룸에 있는 이헌정 작가의 테이블웨어 및 오브제. 4 8월 6일까지 롯데갤러리 잠실 에비뉴엘 아트홀에서 열리는 <The Journey 2017>의 전시장. 전시 사진은 Courtesy The Design Society(Photo by Park, Myung-Rae).


1 실제 생활 공간처럼 연출한 캠프 B. 2 2층 게스트하우스의 침실 공간. 벽에 걸린 작품은 최요셉 작가의 그림. 3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들며 늘 열정적인 작업을 하는 이헌정 작가.

M 작가님의 예술적인 사유와 철학을 듣게 되어 영광이에요. 그리고 오늘 제가 받은 감명을 많은 사람들도 받을 수 있는 전시가 지금 열리고 있다고요.
8월 6일까지 롯데갤러리 잠실 에비뉴엘 아트홀에서 열리는 <The Journey 2017>이에요. 지금껏 그랬듯이 이번 전시 제목도 ‘여행’이죠(웃음). 세라믹과 콘크리트를 결합한 모던 스타일의 디자인 가구, 조명, 타일, 오브제, 설치작품 등 역시나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품 50여 점을 전시하고 있어요. 작품마다 제목은 따로 없어요! 예술은 신문처럼 읽는 게 아니고 느끼는 거잖아요. 관객의 느낌을 폭력적으로 끌고 와서 ‘제가 느끼는 대로 느끼십시오’라고 얘기하는 게 아닌 거 같은 생각에서 제목을 없앴어요.

M 주말에 들러 예술 여행을 떠나야겠어요! 오늘 들은 얘기도 떠올리며 어떻게 만들었는지, 가마 안에서 유약이 흘러내리는 모습도 한 번 상상해보고요. 작가님이 어떤 느낌을 받아 작품을 만들었는지 유추도 해보고요.
어딘가 새로운 지점에서 예기치 못한 것을 경험하는 동시에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기회가 바로 여행이라고 생각해요. 제 작품을 보며 좋은 여행되시길 바랄게요.




기획 : 이경현 기자 | 사진 : 김덕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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