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는 없다"..발포 거부로 고문당했던 5·18 영웅 故 안병하

정윤식 기자 입력 2017. 8. 27. 15:15 수정 2017. 8. 28.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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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 50분 광주 시내에 첫 총성이 울렸습니다.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장교의 M16 소총에서 발사된 총알은 고등학생이던 김영찬 군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이를 신호탄으로 광주 시민을 향한 계엄군의 총탄이 빗발쳤습니다. 총탄에 맞고 군홧발에 스러진 시민들의 시신이 거리에 나뒹굴었고, 구덩이에 뒤섞여 파묻혔습니다.

지금까지 공식 확인된 광주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는 사망 154명, 행방불명 65명, 부상 1628명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당시 시위 현장을 지키던 경찰은 그러나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던 계엄군과는 달랐습니다. 질서유지 임무에만 충실했습니다. 고(故) 안병하 당시 전남 경찰국장(경무관)이 전두환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한 겁니다.

안 국장은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다 결국 신군부에 끌려갔고,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습니다. 경찰청은 22일 권력의 부당한 지시에 항거해 광주 시민의 생명을 지킨 안 경무관을 추모하기 위해 동상을 설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은 최고의 군인에서 경찰로

1928년 강원도 양양의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안 경무관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해 군인의 길을 택합니다. 해방 전후 급변하던 정세 속에 군인은 미래가 보장된 안정된 직장이었습니다. 안 경무관은 6사단 포병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했고 화랑무공훈장을 두 번이나 받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안 경무관의 사관학교 동기였습니다. 잘 나가는 군인이던 안 경무관은 34살이던 1962년 총경(지금의 경찰서장 급)으로 특채돼 경찰의 길을 걷게 됩니다. 승진도 빨랐습니다. 9년 만에 경무관으로 승진한 뒤 1979년 2월 전라남도 치안의 총책임자가 됩니다. 52살에 치안감 승진 대상 1위로 손꼽히며 경찰 최고 간부까지 오를 인물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정국은 불안했습니다. 같은 해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12.12 사태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군부의 압제에 가장 앞서 목소리를 높인 건 대학생들이었습니다.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전국 총학생 회장단의 결의문을 발표를 시작으로 민주화의 열기는 끓어올랐습니다.

광주도 뜨거웠습니다. 5월 14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대학가와 전남도청 일대에서 "계엄령을 해제하라""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5월 17일 00시를 기점으로 전국에 계엄령을 확대합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5월 18일 광주 시내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됩니다.

■ "시민에게 총부리 겨눌 수 없다" 발포 명령 거부

안 경무관의 셋째 아들 안호재 씨는 SBS와 인터뷰에서 당시 안 경무관이 시민들의 분노를 어떻게 잠재워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전했습니다. 치안 총 책임자로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지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가라앉히는 것이 급했기 때문입니다.

안호재 씨는 안 경무관이 생전에 남긴 비망록을 토대로 경찰관들에게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지 말라' '시민 안전에 유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전했습니다. 안 경무관이 직접 전남대 총학생회장과 협상을 통해 촛불과 횃불을 들도록 유도한 결과 초반 시위는 충돌 없이 마무리됐습니다. 그러나 공수부대가 투입되면서 상황은 급속히 악화됐습니다.

안 경무관에게도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안 경무관은 당시 신군부로부터 "군인보다 경찰이 앞장서라"고 지시까지 받았다고 안호재 씨는 전했습니다. 안 경무관은 그러나 전두환 신군부의 지시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경찰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회수하고 시위에 나섰다가 다친 시민들을 치료해주고 음식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공수부대는 발포를 계속했습니다. 5월 18일부터 9일 동안 시민 수백 명이 죽고 다쳤습니다. 안 경무관은 지시불이행을 이유로 5월 20일 보안사령부 요원들에게 끌려갔습니다. 전두환이 육사 11기로 안 경무관보다 3기수나 후배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안 경무관은 까마득한 후배 군인들로부터 고문을 당했습니다.

■ "식구들만이라도 잘 살라"…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끝내

안호재 씨는 아버지 안 경무관이 당시 보안사령부 요원들에게 끌려가기 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식구들만이라도 잘 살라'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던 부하 직원에게는 '마지막일지 모른다'며 밥을 한 그릇 더 달라고 해서 먹었다고 전했습니다.

안 경무관은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사직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인 6월 2일 경찰복을 벗었습니다. 직무유기 등에 따른 불명예 사직이었습니다. 안 경무관은 그러나 고문을 받으면서도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질 테니 나를 따른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지 말아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고 안호재 씨는 전했습니다.

안 경무관은 집에 돌아온 뒤부터 눈에 띄게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바로 이튿날 정신을 잃고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평소 건강하던 52살의 안 경무관은 고혈압에 담낭염 신부전 등 여러 병을 얻었습니다. 의료진은 고문 후유증에 따른 병으로 진단 내렸고 재판에서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건강은 돌아오지 않았고 안 경무관은 결국 1988년 10월 서울의 한 병원에서 혈액 투석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60살이었습니다.

■ 죽을 때까지도 순직한 부하들에 사죄…37년 만에 이뤄진 유언

안 경무관은 숨지기 직전 가족들에게 "순직한 부하들을 챙겨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시위대 버스행렬과 대치하다가 순직한 정충길 경사 등 부하 경찰관들이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입니다. 안 경무관의 가족들은 고인의 뜻을 이어 지난 5월 고(故) 정충길 경사·강정웅 경장·이세홍 경장·박기웅 경장의 추모식을 열었습니다. 37년 만에 유언을 지킨 겁니다.

안 경무관의 부인 전임순 씨는 추모사에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이 자리를 마련했다. 당신들은 희생으로써 많은 광주 시민을 구했고 경찰의 명예를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청이 안 경무관의 흉상을 만들기로 한 결정에 아들 안호재 씨는 감사를 표하면서도 한 가지 남은 바람을 전했습니다. 안 경무관과 함께 당시 광주에 있던 경찰관들의 의로운 행동을 기릴 기록물과 기념비를 마련해주면 좋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디자인: 임수연)     

정윤식 기자jys@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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