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 '헌재 볼모 잡기'..대법원보다 만만하니까?

2017. 8. 2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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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석진환 사회에디터석 법조팀장 soulfat@hani.co.kr

이유정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가 오는 28일 열린다. 이 후보자는 헌법재판관 9인 가운데 대통령이 지명하는 3인 몫으로, 지난 1월31일 탄핵재판 도중 퇴임한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후임이다. 다시 말해 7개월, 200일이 넘도록 헌법재판관 자리 하나가 공석이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긴 공백은 탄핵재판으로 인한 대통령 직무정지와 이후 이어진 대선 등으로 지명권자인 대통령의 부재 탓이었으니, 어찌 보면 불가피한 것이었을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석 달째가 되는 무렵인 지난 8일 공백 해소를 위해 이 후보자를 지명했다. 하지만 알려진 대로 야당은 이 후보자의 ‘정치 편향’을 문제 삼아 청문회를 보이콧해오다 마지못해 청문회 일정을 잡았다. 이 후보자가 대통령 지명 몫이 아니었다면, 아마 국회의 이 후보자 ‘볼모 잡기’는 더 길어졌을 것이다. 대통령 지명 몫 후보자는 국회의 임명동의 투표 대상이 아니어서, 인사청문요청서가 제출된 지 20일 안에 그 절차가 완료되지 않으면 대통령이 후보자를 임명할 수 있다.

지난 6월8일 국회에서 열린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모습.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버스를 운전했던 배용주씨가 증인으로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는 동안 김 후보자가 이를 듣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대신 국회는 국회의 임명동의 투표가 필요한 또 다른 헌법재판관을 ‘볼모’로 잡고 있다. 바로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다. 지난 6월8일 국회 인사청문회가 끝난 뒤 80일이나 지났지만, 국회는 아직 임명동의 투표 일정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여야 원내수석부대표가 오는 31일 투표를 하기로 한 차례 합의했다가, 다시 없던 일이 되면서 8월 국회 처리가 물 건너간 셈이다. 전임 박한철 소장 퇴임 이후 헌법재판소장의 공백 기간을 계산하면 207일에 이른다. 1988년 헌법재판소가 생긴 이후 최장 기간이다.

이는 국회가 국민의 기본권 침해를 구제하는 이 나라 최고 헌법재판기관의 발목을 잡고 비정상적인 체제를 방치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현재 헌재에는 ‘양심적 병역거부’ 같은 주요 위헌법률심판만 50건이 넘게 계류돼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국과 일본 정부의 위안부 합의가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낸 헌법소원 사건도 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헌재의 심판 지연으로 청구인이 사망해 심판 절차가 종료된 사건이 9건이라는 지적이 나온 바 있는데,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심각하게 봐야 하는 대목은 국회가 임명동의가 필요한 헌법재판관이나 헌재소장을 다른 정치적 ‘협상 카드’로 활용하려고 막무가내로 붙들고 있는 일이 상습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2006년 헌재소장으로 지명된 전효숙 재판관의 중도 낙마로 후임인 이강국 소장이 취임하기까지 140일 동안의 소장 공백 사태가 있었다. 또 2013년 이강국 소장의 후임으로 지명된 이동흡 후보자의 낙마 때도 후임인 박한철 소장이 제자리를 잡기까지 80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 김이수 후보자까지 포함하면, 헌재는 소장이 바뀔 때마다 심각한 업무 공백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오죽하면 박한철 소장이 취임사에서 “헌재가 (재판관)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것은 헌법을 무시하고 헌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헌재 공백 사태는 국가 긴급사태 못지않은 헌법 장애 상태”라고 토로했을까.

헌재에 대한 국회 ‘몽니’의 압권은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 낙마 사태였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은 2011년 청문회에서 천안함 사건에 대해 “정부 발표를 신뢰하지만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다”는 조 후보자의 답변을 꼬투리 잡아 1년2개월 동안이나 임명동의 투표를 해주지 않았다. 야당 몫으로 조 후보자를 추천한 민주당도 사태를 방치했다. 결국 이듬해 조 후보자는 낙마했고, 후임으로 지명된 김이수 재판관이 이번엔 200일이 넘도록 동의투표를 받지 못하는 일을 되풀이해 당하고 있다.

한참 전 정치권의 한 중진 인사는 국회가 유독 헌법재판관과 소장에 대한 임명동의를 오래 끄는 이유에 대해 이런 가설을 내놓은 적이 있다. “대법원장이나 대법관은 모두 국회의 동의투표 대상이지만, 그렇게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다. 왜냐? 법원이 국회의원의 ‘목줄’을 잡게 되는 경우가 언제든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헌재는 국회와 이해관계가 부딪힐 일이 거의 없어 그런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이는 그야말로 가설일 뿐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보수정당의 상식적이지 않은 ‘이념 공세’와, 또 그에 못지않은 민주당 등 집권세력의 ‘수수방관’을 지켜보자면 자꾸만 그 가설이 떠오른다. 국회의 헌재 ‘볼모 잡기’가 오래 지속되면, 언젠가는 ‘인질극’이란 표현을 쓰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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