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일의 시시각각] 동물복지의 청구서

홍승일 2017. 8. 26.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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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달걀 위한 동물복지엔 가격 인상 수반
재원 몰라라 남발하는 복지정책 반면교사
홍승일 수석논설위원
『금수회의록』(안국선, 1908)과 『동물농장』(조지 오웰, 1945)이 동물 눈에 비친 인간 탐욕과 부조리, 전체주의를 꼬집은 우화라면 살충제 달걀은 자본주의 공장 축산 시스템에 대한 저주다. 좁디좁은 축사 케이지에서 꼼짝없이 알만 낳다가 도축돼 생을 마감하는 암탉들의 반란 같다.

닭의 해 정유년에 ‘정유계란(丁酉鷄亂)’을 겪으면서 동물복지가 다시금 화두다. 소·돼지·닭처럼 의식과 감정 있는 ‘감응 동물’은 뉴질랜드 2015년 입법 사례처럼 종전과 달리 대접하자는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정작 사태의 중심에 있는 축산농민들은 착잡한 기색이다. “닭장의 A4 용지만 한 면적에 어떻게 3마리까지 밀어 넣어 키울 수 있단 말인가?” “스트레스에 찌든 닭이 낳은 불량 달걀은 몸에 해롭다” 등등 세간의 비판에 시니컬한 표정들이다. 그게 어디 어제오늘 일인가요? 양계 종사자들의 해법은 간단하다. “그럼 땅에 풀어서 잘 키울 테니 두세 배로 오를 달걀값 낼 준비나 하세요.”

달걀은 일부 프리미엄 제품을 제외하면 완전경쟁 시장에 가깝다. 국내 7000만 마리 암탉이 낳는 하루 수천만 개의 달걀은 가격에 민감해 개당 몇원에 판매가 왔다 갔다 한다. 경기도 양평의 한 영농조합 대표는 “살충제 달걀 때문에 양계장이 간접살인의 주범 소리를 듣지만 값싼 제품만 찾는 대다수 소비자도 방조자로서의 책임이 크다”고 비판했다. “값싸고 안전하면서 품질까지 좋은 농수축산물은 세상에 없다”는 게 영농인들의 목소리다.

닭을 가둬 기르는 케이지 농장을 모두 자연 방사 농장으로 바꿀 경우 달걀 생산이 얼마나 줄까 추정했더니 무려 10분의 1 이하로 급감하는 걸로 나타났다(이홍재 대한양계협회장). 그렇게 되면 달걀을 수입해야 할 판인데 그게 간단치가 않다. 가령 동물복지를 열심히 하다가 부족해진 달걀을 수입하는 독일은 최근 네덜란드 살충제 달걀 파동의 최대 피해국이 됐다.

사실 좁은 국토에서 닭을 대거 방사 사육할 땅도 많지 않다. 태양전지판 설치 공간이 넉넉해야 하는 태양광 발전이 우리나라에서 쉽지 않은 이치와 비슷하다. 혹여 땅이 있어도 양계장을 고분고분 반겨줄 동네는 드물다. 금수강산(禽獸江山) ‘축산 포비아’가 번질 정도로 곳곳이 축산 포화 상태다.

동물복지 달걀을 금세 늘리는 건 제품 가격 상승과 수급 불안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는 현 정권 탈원전 에너지 전환 정책과 매우 흡사하다. 암탉에 살충제 샤워 대신 탁 트인 땅에서 모래욕·일광욕 호사를 시킬 여건이 녹녹하지 않다는 뜻이다. 동물복지 인증 제도가 2012년 닭부터 도입돼 돼지·소 순서로 확대됐지만 지지부진한 걸 보면 안다.

동물복지를 포함해 사육환경 전반을 짚어보고 백서도 만들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관심은 반갑지만 걱정도 된다. 지지율 80% 대통령의 한마디에 담당 부처가 오버할까봐서다. 한 해 135억 개 달걀을 먹는 나라의 달걀값이 동물복지 드라이브로 500원, 1000원으로 뛰면 어찌될지, 그리고 부유층은 유기농·친환경 인증 달걀, 서민은 200~300원짜리 철제 케이지 달걀 식의 소비불평등은 어찌할 건지 따져볼 일이다. 재원은 뒷전인 채 쏟아지는 새 정부 복지정책 같아서는 곤란하다.

사실 식품 쪽 문외한인 약사 출신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이 취임하자마자 맞닥뜨린 사건 치고 살충제 달걀은 너무 벅차 보인다. 식품안전의 중요성이 커지는 시대에 국민과 본인 모두에게 불운한 일이다.

홍승일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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