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뉴스] 당시 미국은 5·18을 어떻게 봤을까?

박용필 기자 2017. 8. 2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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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23일 국방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헬기 사격’과 ‘전투기 출격 대기’에 대해 특별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5·18 당시 무장 헬기들이 시민들을 향해 기총 소사를 했음을 입증하고, 최근 당시 공군 조종사들의 증언으로 알려진 ‘광주 폭격 작전’의 실체를 규명하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헬기 사격’의 경우 여러 명이 증언했습니다. 지난해 ‘광주 전일빌딩 탄흔’이 발견됐습니다. 군 관련 문서 등에서 ‘헬기 사격’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조사는 ‘헬기 사격’의 실재 여부를 밝히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최초 발포 명령자’ 규명이 최종 목표라는 관측이 지배적입니다. 즉 누가 주모자였나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죠.

미 국방정보국 비밀문서 계엄군의 폭력적인 진압이 ‘전두환의 게임 플랜’이었다고 분석한 미 국방정보국(DIA)의 1980년 6월4일 기밀문서.

이를 두고 다시 곱씹어 볼만 한 보도를 소개합니다. 경향신문은 지난 4월 5·18 전후 미 정부 군사·외교 비밀문서 3800여쪽을 분석했습니다. 미국 언론인 팀 셔록이 1991년부터 정보공개로 모아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기증한 자료입니다.

이 문서들에선 군의 ‘헬기 사격’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문서 중 헬기 관련 언급은 “한국군이 부상자 이송을 위해 헬기 출동을 요청했다” “폭도들이 헬기들을 향해 사격했다는 보고가 있다” 정도 기록됐습니다. 그러나 해당 문서들은, 5·18 당시 학살과 발포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시사합니다.

경향신문 2017년 4월14일자

문서를 분석한 경향신문은 지난 4월14일자 기사를 통해 “미 국방정보국(DIA) 소속 요원은 1980년 6월4일 한국에서 본국으로 보고한 전문을 통해 5·18 당시 계엄군 발포의 배후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있었다고 보고했다”고 전했습니다. ‘한국 혼란 업데이트’라는 제목의 이 문서에서 요원은 “5월17일 광주에 배치된 7공수여단이 과잉반응을 보인 것은 맞다”고 인정하면서 그‘과잉반응’이 전두환의‘게임 플랜(game plan)’의 일부”였다는 분석을 덧붙였습니다.

1980년 5월20일 작성된‘광주 상황 업데이트’에서도 5·18 당시 계엄군의 대응과 관련 “군대는 그들의 힘을 자제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계엄군의 잔인한 대응을 두고 1980년 6월9일 작성된 DIA 문서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사정권의 지배자들이 베트남전에서 얻은 전투 경험을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기사는 이같은 문건의 내용들을 소개하며 “미국 정부는 당시 학살의 배후로 전두환 씨를 지목했다”고 전합니다. “당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며 사실상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당시 미국의 판단”이었다는 겁니다.

경향신문 2017년 4월14일자

문서에는 당시 미국이 5·18 당시 광주를 어떻게 바라봤는지에 관한 내용도 나옵니다. 당시 주한 미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은 1980년 6월10일 본국에 보고한‘광주사태에 대한 내부 정보원의 기록’ 문서에서 “우리가 광주에서 본 것은 (공권력에 의해) 극도로 몰아붙여진 시민들의 시위였다. 이 시위는 정책과 계획이 없는 폭력적 분노였으며,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의 일시적인 무법이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면서 “5·18사태는‘보스턴 차 사건’과 비슷하다”고 덧붙였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은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1773년 보스턴 시민들이 영국 동인도회사의 차 판매권 독점에 항의하자 영국 정부가 무자비하게 진압해, 결국 미국 독립혁명의 시발점이 된 사건입니다. 기사는 이를 두고 미국이 당시 광주를 “폭도 아닌 자유시민의 도시”로 봤다고 전했습니다.

5·18 당시 미국 비밀전문인 ‘체로키 파일’ 공개를 주도한 미국 언론인 팀 셔록이 4일 광주 동구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문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광주 상황을 이같이 판단한 미국이 왜 학살을 막지 못했는지도 다룹니다. 기사는 외교 문서를 직접 발굴한 언론인 팀 셔록의 말을 인용합니다. 그는 “미국은 인권보다 안보에, 박정희 체제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보다 군부 내 분열 방지에 더 관심이 있었다”며 “그때 미국이 박정희 체제에 대한 시민들 반감 알았다면 한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표했다고 합니다.

셔록은 당시 주한 미 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한국을 잘 이해했던 괜찮은 외교관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외교 활동이 주로 정부와 군의 고위인사들에 국한돼 있었고 김영삼·김대중 등 야당 지도자들이나 정부 반대파들과 직접 만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미국은 박정희 체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감이 얼마나 큰지 잘 이해하지 못했고, 한국 사회 전체보다 군부 내의 균열을 막는 데 더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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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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