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실종된 인문학 정책.. "10년 공든 탑 무너뜨린다"

2017. 8. 24.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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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한국'(HK) 사업 8월말 종료 예정
후속사업에서 기존 연구소 배제
10년 동안 쌓아온 연구역량 사라질 판

[한겨레] 최근 교육부가 인문학 지원 국책사업인 ‘인문한국’(HK)의 후속사업으로 ‘인문한국플러스’ 사업계획을 발표하면서, 기존 인문한국 참여 연구소들의 지원을 배제한 조처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대로 8월말 인문한국 사업이 종료되면, 지난 10년 동안 활동해온 연구소와 연구 인력들이 ‘공중분해’될 위기다. 지난 23일 김성민 인문한국연구소협의회장(건국대 인문학연구원장), 김애령 이화여대 인문과학원 인문한국 교수, 박용진 서울대 문명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가 <한겨레>에서 만나 인문한국 후속사업의 문제점과 인문학 진흥 정책의 올바른 방향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김성민 2006년 ‘인문학의 위기’를 우려하는 인문학자들의 선언이 ‘인문한국’ 사업의 계기가 됐다. 기존 학과 중심의 연구에서 연구소 중심의, 아젠다 중심의 협동연구 체제로 전환하자는 것이 뼈대였다. 인문학을 활성화하기 위해 정부와 대학이 협업하는 보기 드문 사례이기도 했다. 그 결과 2017년 8월 기준으로 43개 연구소, 인문한국 교수 229명, 인문한국 연구교수 193명이 이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연구소별로 발판을 마련했고 이제 도약해야 할 시기인데, 교육부에서는 후속사업인 ‘인문한국플러스’(이하 플러스) 사업에 기존 인문한국 참여 연구소는 지원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 조처의 문제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김애령 무엇보다 지난 10년 동안 연구해온 노력이 불과 몇 달 사이에 송두리째 부정당했다는 당혹감이 크다. 인문한국 사업은 한 연구자가 한 주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학제간 협업을 통해 공동의 아젠다를 연구한다는 특수성이 있다. 이화여대 인문과학원의 경우 2007년 인문한국 사업을 시작해, 2010년부터 ‘포스트 휴먼’ 주제로 연구를 수행해왔다. 이제 국외 유수의 전문가들과 함께 영문 학술저널을 시작하는 등 국제적인 학술 네트워크에서 이름을 알리고 제구실을 할 인프라를 갖춘 상태다. 그런데 플러스 사업에 참여할 수 없게 되면 그 모든 노력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된다. 92명의 연구교수들이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것 자체도 큰 문제지만, 이것이 단지 ‘밥그릇’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한다.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의 경우, 인문한국 사업을 통해 냉전, 정동, 이동의 관점으로 아시아를 바라보는 다양한 아젠다들을 제출해왔다. 국내 대학 체제에만 갇히지 않고 국제적인 협동 연구의 흐름이나 대학 밖의 지역과 사회와 만나는 접점들도 만들 수 있었다. ‘인터아시아’ 학회와 같은 국제적 연구 네트워크에 참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인문한국 사업이 연구소 중심의 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박용진 연구자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밥그릇이 아니라 연구의 단절이다. 연구교수의 경우 당장 연구 공간이 사라진다. 도서관에서 책도 대출하지 못하고 그동안 연구비 지원으로 마련했던 자료들도 다 반납해야 한다. 인문한국 사업은 애초 “세계적인 연구소를 만든다”는 30~40년의 장기 전망 아래에서 만들어진 정책이다. 지난 10년은 그 1단계로 봐야 한다. 2006년 작성된 인문한국 사업계획서를 보면, “향후 30~40년 동안 사회 장기 전망 아래에서 10년 동안 수행할 아젠다를 정하라”고 되어 있다. 현재 교육부는 이런 근본적 취지를 무시하고 변질시키고 있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은 문명 연구를 통해 ‘우리말로 학문하기’를 중점적으로 천착해왔는데, 이는 10년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장기 과제다. 확산은 심화를 전제로 한다. 깊은 샘물을 파야 더 많은 물을 나눌 수 있다.

강성현 인문한국 사업은 기존 연구재단의 지원 사업들처럼 사업 중심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프로젝트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비전과 로드맵, 사람과 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데, 기존 연구재단 사업들은 단기적 목표와 성과 내기에 제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구자와 팀을 키울 수 없었다. 연구재단 사업들 가운데 인문한국 사업이 그나마 사업과 연구자, 팀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제도였다. 지금 교육부의 ‘플러스’ 사업은 연구소 중심의 정책을 대학 중심으로 되돌리는, ‘가짜’ 인문한국 정책이다. 교육부에서는 ‘10년 지원했으면 자립하라’는 논리를 편다. 이미 인문한국 교수는 사업 10년이 지나면 학교에서 인건비를 부담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일몰사업’이란 논리로 연구소에 대한 지원을 아예 끊어버리면, 연구소 자체가 공중분해되고 인문한국 교수는 학과별로 배치될 것이다. 10년 동안 쌓아온 연구 성과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김성민 현재 인문한국 사업들을 보면, 포스트 휴먼, 동아시아학, 통일인문학, 문명 연구 등 개별적인 연구자 차원에서 할 수 없는 연구들이 대부분이다. 연구소 중심의 협동연구 체제에서 어젠다 집중력을 갖고 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연구들이다. 그 토대에는 10년 동안 인문한국 교수, 연구교수의 인건비를 지원해 협동 연구를 장려한 정책이 있었다. 그런데 플러스 사업에서는 그 기간이 7년으로 줄었다. 7년이면 정교수 심사를 받을 수 없는 기간이기 때문에, 정년 보장은 힘들 수도 있다. 채용해야 하는 인력의 기준도 기존 ‘1억5000만원당 1명’에서 ‘3억원당 1명’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인문한국 사업과 형평성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 동일한 사업에 다른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대학 내 행정난맥을 가져올 수 있다.

박용진 인문한국 교수의 임용 문제를 두고 여러가지 잡음이 발생하는 등 기존 인문한국 사업에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육부는 플러스 사업에서 이런 문제를 바로잡기는커녕 더 모호하게 만들었다. 위에서 내려꽂는 ‘탑다운’ 방식으로 연구 주제를 선정한다거나, 단기적인 성과를 요구한다거나 하는 등 기존 취지를 역행하는 모습도 보인다.

김애령 정당한 평가를 통해 지속사업이 가능했다면, 인문한국 사업의 현재 문제점이나 한계를 어떻게 개선해나갈 것이냐 등 훨씬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공론장에서 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의 취지를 뒤엎는 데다가 밀실에서 만들어진 플러스 사업이 그런 성찰의 기회마저 박탈해버렸다.

김성민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른 연구소들이 신규로 진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인문한국연구소협의회 차원에서는 ‘투트랙’으로 기존 연구소와 신규 연구소가 함께 가는 대안까지 제시했었다. 기존 연구소는 사업이 종료되면 인문한국 교수 인건비를 학교에서 부담하게 되니까, 기존 지원액의 30~40% 정도만 있으면 인문한국 연구교수 인건비와 사업비로 쓰면서 연구소를 운영할 수 있다. 올해 확보된 130억원 예산 가운데 신규 연구소를 8개 정도 선정하면, 나머지 50억~60억원을 정당한 평가를 통해 기존 연구소 가운데 우수 연구소에 지원해달라는 것이다.

박용진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교육부 논리는 그야말로 ‘나눠먹기’의 형식논리다. 인문학 지원에 대한 큰 철학과 틀이 없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다. 그동안 인문한국 사업을 진행해오면서 매년 보고서를 써왔는데, 연구재단에서 주로 평가하는 항목들은 ‘몇 명 채용했나’, ‘규정은 만들었나’ 등의 제도적인 측면에 그친다. 학문적 성과를 묻는 정성평가는 제대로 받아본 일조차 없다.

강성현 학과 중심에서 연구소 중심으로 흐르던 연구 지원의 패러다임을 다시 거꾸로 되돌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인문한국 사업을 빼면, 기존 연구재단 지원 사업들은 이른바 ‘학문후속세대’를 거의 포기했다. 연구재단 지원사업을 보면, 적어도 대학 조교수 정도 되어야 ‘신진 연구자’ 지원사업에 지원할 수 있을 정도다. 박사까지 마친 연구자들도 연구, 강의에 참여할 길이 없다. 학계가 고사 직전이다. 그나마 인문한국 사업이 학문후속세대에 어느 정도 길을 열었었는데, 플러스 사업은 그걸 예전처럼 되돌린다는 것이다.

김애령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 연구소가 연구재단과 같은 국가 재원이 없다면 그 어디서 재원을 지원받을 수 있을지 묻고 싶다. 인문학자들이 게으르거나 무력하거나 수동적이어서가 아니라, 이 영역의 특수성이 있다. 우리나라 전체 연구비 지원 규모인 4조원 가운데 인문학 지원 규모는 5% 정도밖에 안된다고 한다. 과연 그것조차도 이렇게 인문학자들의 목을 죄어가면서 해줘야 하는 것인가?

박용진 인문학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지 않는 국가는 없다. 인문학은 ‘인프라스트럭처’이기 때문이다. 중국만 해도 현재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인문학 투자를 벌이고 있다. 인문학에 대한 정책 담당자들의 몰이해가 심각하다.

강성현 예컨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아직까지 한국에서 직접 만든 정본 자료집이 없어서 일본 자료집을 번역해서 쓰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그동안 미국 등 자료기관에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서 자료집을 만드는 작업에 매진해왔다. 그러나 지난 정부는 ‘위안부’ 연구와 외교의 토대를 만드는 작업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억압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위안부’ 관련 영상을 발굴해 공개했더니, 정부를 포함해 여기저기서 연구비 지원하겠다는 연락이 온다. 기초 학문에 대한 장기 투자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휘발성 있는 단기적인 성과에만 반응하는 모습이다.

김성민 인문한국 사업이 후속사업을 맞이하며 애초 취지를 벗어나 왜 이렇게 변질됐는지에 대한 정확한 사태 파악과 분석이 필요하다. 그 흔한 공청회조차 한 번 없었고, 불과 몇 달 사이에 지침을 하달하는 방식으로 일방적인 통보만 내려왔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의구심만 더욱 커지는 형국이다.

김애령 10년 동안 공들여왔던 진지한 연구와 그것을 해온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공동연구의 역량이 어떤 형태로든 지속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용진 인문학에 대한 이해, 평가 방식 등이 전체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단기적인 성과주의에서 벗어나 인문학의 장기적인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 그래야 애초의 사업 취지에 따라 10년 동안 쌓은 발판을 딛고 ‘세계적인 연구소’란 목표로 나아갈 수 있다. 진정한 연구소라면, 명실상부한 ‘연구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인문한국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 사업이었다.

강성현 과거 ‘황우석 사태’를 고민해보곤 한다. 세상은 학문에게 화려함과 열광을 요구하지만, 학문은 성찰로 하는 것이다. 인문학의 성과란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사회 각계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로드맵을 함께 고민해 만들어갔으면 한다.

김성민 인문한국 사업의 애초 취지와 철학에 기초하여 후속사업인 플러스 사업의 시행의 유보하고 진정한 인문학 연구를 위한 공론적인 토론에 기초한 발전적인 사업안을 만들어가기를 교육부에 요구한다. 한국 대학의 인문 역량 체계가 붕괴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인문학자들의 뜻을 모아서 이것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정리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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