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기획] '한국형 숙의민주주의' 실험..신고리 공론화위 의미는

홍주형 2017. 8. 24.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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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결에 묻힌 소수의견도 존중 .. 정책갈등 접점 찾나/ 신고리 공론화위 1차 조사 돌입 / '신고리 모델' 시범 사례 될 듯.. 공론화 도입 대상은 어디까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공론화 1차 과정으로 전국 2만명 대상 설문조사를 25일 시작한다. 김지형 위원장은 24일 5차 공식회의 뒤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1차 조사는 8월25일부터 보름 정도 진행된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지금까지 해온 공론화 설계는 그림으로 치자면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라며 “앞으로 밑그림에 색을 잘 입히는 일(공론화 관리)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1차 전화 조사 설문 문항은 △지역·성별·연령 등 기본질문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인지 여부 △건설 중단·재개·유보 의견으로 구성된다. 휴대전화와 집전화를 90%, 10% 비율로 혼합한다. 공론조사 대행업체 우선협상 대상자로는 한국리서치 컨소시엄이 선정됐다.

공론화위가 출범 한 달을 맞았지만 정치권 안팎에선 여전히 논란이 뜨겁다. 문재인 대통령이 ‘탈원전’을 정책 방향으로 천명한 상황에서 공론화위 활동이 형식적 절차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특히 앞으로 문재인정부가 주요 갈등 사안에 대해 공론화 방식을 적용할 의지를 보이며 공론화위 활동 하나하나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김지형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장(오른쪽)이 24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공론화위 6차 정례회의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남제현 기자

◆한국형 ‘숙의민주주의’ 모델은

국내 정책 결정에 한번도 도입된 적이 없기 때문에 공론화는 신고리 모델이 시범 사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조사에선 시민 2만여명에게 1차로 여론을 묻고, 이 중 중도이탈자를 제외한 350명을 대상으로 토론회, 공청회 등 숙의를 거친 뒤 최종 의견을 묻는다. 찬반을 묻는 공론조사를 주로 쓰는 영미식과 충분한 토론을 거치며 숙의토론을 하는 프랑스식 공론화의 중간 형태다. 한국형 공론화 방식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내부 전언에 따르면 당초 신고리 공론화에 사용키로 한 것은 찬반이 명확히 표기돼 해석의 여지가 작은 영미식 공론조사다. 내외부 전문가 조언에 따라 현재는 프랑스식 숙의토론 기법이 상당히 포함됐다. 은재호 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찬성, 반대로만 접근하는 것은 다수결 원리와 다를 바 없다”며 “공론화를 하는 이유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찬반 입장에 가려 있는 다양한 함의를 파악해 보다 합의 가능한 지점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다수결 원리에만 충실한 대의민주주의를 숙의민주주의가 보완하고, 이 둘의 상호 보완이 민주주의 발전의 지향점이 돼야 한다는 인식에 충실한 방향 선회다. 은 위원은 “국회에서 토론과 합의가 이뤄지는 문제들이면 공론화를 할 필요가 없다. 정쟁만 하고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에 합의 가능한 지점을 찾기 위해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밀양 송전탑 사태나 제주 해군기지 건설 등이 예로 거론된다.

◆공론화 영역 확대 가능할까

문 대통령은 지난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공론조사를 통한 사회적 합의를 따르겠다는 건 아주 적절한 과정”이라며 “공론조사를 통해 합리적 결정을 얻어낼 수 있다면 앞으로 유사 갈등 사안에 대해 중요한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무조정실 핵심관계자는 “신고리 5·6호기는 (문재인정부의 전체적인 탈원전 기조와는) 완전히 별개로 새로운 정부의 의사결정 방식에 대한 하나의 시범 케이스로 운영하고 있다”며 사견을 전제로 “지난 정부부터 국무조정실에 쌓여 있는 약 20건의 사회갈등 사례를 공론화를 통해 해결하는 것도 좋은 접근”이라고 말했다.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안에는 공론화가 좋은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공론화 확대론자들도 공론화는 단순 여론조사나 공청회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발생하므로 이를 편익과 비교해 편익이 더 클 경우에 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주로 전체 대표성과 효율성이 강조되는 국가적 수준의 문제는 국회 논의가, 지역 효율성이 강조되는 지역 수준의 문제는 공론화가 우선이다.
신고리 5·6기 공론화위원회 김지형 위원장(왼쪽 줄 앞에서 세 번째)을 비롯한 위원들이 2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로부터 위촉장을 받은 뒤 첫 번째 회의를 하고 있다.
이재문 기자

실제 행정 현장에선 사안에 따라 달리 접근해야 한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정부가 ‘증세 공론화위’를 검토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자 당정청 관계자들은 일제히 이를 부인했다. 다만 사실 여부와 관계 없이 어떤 사안이 공론화에 부쳐질 수 있는지 토론이 오가는 계기가 됐다. 국민의당 박주선 비상대책위원장은 “재정은 정부의 책임이고, 의회의 책임”이라며 국가재정은 의회가 논의해야 할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여당 원내지도부 핵심관계자도 “조세 문제는 공론화로 논의할 사항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한국갈등학회 회원인 민주당 신창현 의원은 “어떤 사안을 공론화할지는 연장을 선택하는 정책결정자의 판단”이라면서도 “이해관계가 작용하는 문제는 당사자 간 합의, 일반 시민의 폭넓은 의견을 물어야 할 때는 공론화가 적합하다”고 말했다. 다른 여권 관계자는 “여론 분포가 처음부터 7대 3, 6대 4로 명확하게 나뉜 분야는 공론화를 하지 않는다”며 “59대 41처럼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야에서 공론화를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어떤 갈등 사안을 공론조사로 접근할지에 대해 보다 면밀한 기준을 제도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국회에는 민주당 박정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책사업갈등조정토론위원회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이 제출돼 있다. 법안은 국책사업에 한정해 프랑스 공론화 기구(CNDP) 규정을 차용해 공론화 대상 요건을 다루는데, 총사업비 기준, 공론화 위원과 해당 부처 주무장관의 요청 등으로 세분된다.
브리핑하는 공론화위.

◆책임 주체는 여전히 난제

신고리 공론화위 출범 당시 정부가 “공론화위가 결정하면 그대로 수용하겠다”고 하자 이는 공론화위의 법적 근거 논란으로 번졌다. 정부는 일관되게 최종 법적 책임을 진다고 했지만, 공론화위가 명확한 찬반을 결정해 정부의 결정 부담을 덜어주길 바랐던 것이 논란을 촉발시켰다는 분석이다.

숙의 토론 시간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야당은 에너지 정책과 같은 국가 대계를 임기 5년 정부가 3개월간의 시민 숙의 절차로 결정해선 안 된다는 논리를 편다. 하지만 신고리 공론화의 경우 공사 중단으로 인한 엄청난 매몰 비용 때문에 공론화 기간을 더 늘리기가 어렵다는 현실론이 나온다.

박정 의원안에 따르면 갈등조정토론은 최소 4개월에서 최장 12개월간 진행하게 돼 있다. 신고리 공론화위는 시민참여단에게 한 달 학습 시간을 준 뒤 2박3일 토론을 진행한다. 이와 관련, 은 위원은 “2박3일보다는 하루씩 세번, 또는 1박2일씩 두번 정도로 만나는 횟수를 늘리는 게 좋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권고안 작성 방식 ‘뜨거운 감자’

정부가 전폭적으로 수용한다고 밝힌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의 권고안 작성 방식은 여전히 논의 중이다. 공론화위는 24일도 이 부분에 대해선 “논의 중”이라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공론화위가 권고안 작성 방식을 섣불리 확정하지 못하는 것은 이 부분이 책임소재 논란을 재발시킬 수 있는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이다. 공론화위는 최종 권고안에 3차조사까지 나타난 찬반 비율을 그대로 적고, ‘찬반을 넘어선 대안적 권고’를 통해 정부 정책 결정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지향점은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권고안에 명확한 찬반을 적을지, 찬반을 적는다면 어떤 오차범위에서 찬반 중 하나의 입장을 취할 것인지, 대안은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 모두가 쟁점사항이다. ‘애매한 결론’을 적을 경우 최종 결정은 다시 정부의 몫으로 돌아간다.

은재호 위원은 “정부가 편한 결정을 내리려고 공론화위가 정리해서 찬반을 결정해달라고 하면 무책임한 것”이라며 “찬성이 51이고 반대가 49라고 할 때 그 숫자에 의지해 원전의 문을 닫겠다고 하면 다수결 논리와 차이가 없다”고 지적했다. 찬성한다면 찬성하는 이유, 찬성하지만 반대하는 논리 중 어떤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반대하면 반대하는 이유, 반대하지만 찬성하는 논리 중 어떤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하나하나 물어서 권고안에 구체적으로 적어야 공론화의 취지에 맞다는 것이다. 은 위원은 “그렇게 하면 정책을 만들 때 ‘재조합’이 가능하다”며 “찬반을 택하는 게 아니고 찬반 입장 뒤에 숨어있는 다양한 가능성의 교집합을 찾아 좀 더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정책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공론화위 이희진 대변인은 통화에서 “어떤 의제를 설정해서 공론화를 하느냐에 따라 권고안 작성 방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의제 조율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전했다.

홍주형 기자 jh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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